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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꺼운 손가락 Oct 30. 2020

날아라 바퀴의자

마지막 이야기

내가 자랐던 시대에는




50. 날아라 바퀴의자


나 같은 장애인이 악기를 하는 것, 돈을 버는 것, 제대로 된 직장에 다니는 것, 결혼, 자녀를 낳고, 손주까지 보는 것. 차를 모는 것. 이 모든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들 말했다.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수군거렸다. 손가락질했다. 비아냥거렸다.


그 말은 모두 틀렸다.

나는 연주자가 되었으며, 흔히들 말하는 번듯한 직장엘 23년간 다녀 정년퇴직도 했다. 딸아이 결혼식에서는 한 손으론 딸의 팔을, 한 손으로는 휠체어의 바퀴를 굴리며 입장했다.


딸 셋에 손주가 2명이나 생겼다. 나의 딸들과 손자 손녀 중 다리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다.

 

내 아이들은 뛰어다닌다. 날아다닌다.


소아마비는 진실로 유전이나 전염병이 아니다. 알고 있었지만, 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걷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아이가 열이라도 오르는 날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의 첫 손녀가 다리에 힘을 주어 걷는 것을 보고 혼자 많이 울었다.

누군가 딸들은 문제가 없었지만 대를 걸러 나타날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며 뒤에서 말했다. 쫓아가서 면전에 욕이라도 해줄걸. 아닌 걸 알면서도 그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을 놓기가 어려웠다. 천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절대로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세상에서 가장 이쁜 나의 아가들은 기저귀를 차고 내 휠체어를 밀어 보려 뒤뚱거린다.


잠시 멈춰서 거울을 보니 흙바닥에서 굴러다니며 축구하던 어린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주름과 흰머리가 가득한 웬 노인네가 앉아 있다.


도대체 산다는 게 뭔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나의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내가 낫기를 바라셨지만, 낫지 않았다고 포기한 게 아니라 장애를 가졌냐 아니냐에만 갇혀 있지 않기를 바라셨다. 남자냐 여자냐, 미국 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냐, 걸을 수 있느냐 아니냐. 이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살아가면서 모두와 어우러져 살아가라고 하신 게 신이 설계하신 내 인생이었다.

어린 시절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고는 내 인생을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지난 65년을 감사와 은혜로 살아왔다. 혈기왕성한 스무 살 때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조차 버거워서 남들이

‘신이 너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게 많은가 보다.’

‘나중에 다 잘 될 거야.’라는 입바른 말들이 수틀린 날에는 저주로 들렸다.

내 미래에 대한 예고편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내 앞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글쎄. 비장애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비교한다는 게 말이 안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사람들의 시선과 차별도 그렇지만, 어마어마한 육체적 피로감이 평생을 따라다닌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은 점점 굳어져간다. 나는 양다리를 전혀 쓸 수가 없고, 왼쪽팔도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생활은 다 오른팔로만 한다. 살아오면서 내 오른팔은 그냥 오른팔이 아니었다. 내 오른팔이 짊어진 짐이 너무 많다. 바이올린만 해도 벅찬 팔인데 차와 휠체어를 오가는 순간, 바닥에서 움직일 때 등등 내 오른팔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내 몸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낸다. 아차, 하는 순간에 팔이 삐끗하기도 하고, 한 시간짜리 교향곡을 연주할 때는 휠체어에서 옴짝달싹을 못하니 온 몸이 쩌릿하다. 연습이 길어지고, 하루 종일 악기를 붙잡고 있어야 되는 날이면 척추부터 머리끝까지 쑤시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통증이 몸에 붙어있다. 얼마 전에 결국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고 나니 그나마 사용하던 팔마저 쓸 수 없게 되어 6개월을 침대에서 누워 지냈다. 아내와 막내딸이 없었다면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지난 65년간 내가 한 일은 그저 내 앞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부끄럽게도 어떤 일이든 내가 먼저 하겠다고 나선 적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 능히 해냈을 일일 텐데 내게 하게 된 것이니 감사한 게 아닐까 한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장애가 감사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장애를 통해 깨닫게 된 것들에 감사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했다면 그것이 장애였겠지.


돌아보니 나도 나의 인생길이 놀랍다. 나는 놀라운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저 이 자리에 엉덩이 단단하게 박고 앉아 계속 달려왔을 뿐이다. 그랬더니 삶의 순간순간마다 천사들이 나를 먼저 찾아냈다. 그들이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고, 나는 단지 그 손을 잡았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나를 쳐다본다.

무슨 생각으로 쳐다보든, 아무 의미 없이 바라보는 것이든 이제는 상관없고 괜찮다.

이런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까지는 반세기가 넘게 걸렸다.


극복하고 초월하고 싶어서 미친 사람처럼 연습에 매진했었다. 지고 싶지 않아서 어깨에 힘을 주고 눈에도 힘을 주고 말에도 힘을 주고. 푸르니에나 펄먼처럼 사람들이 장애는 아예 언급조차 안 하는 연주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를 더 몰아치고 극한으로 몰아갔었다.

그랬던 내가 점차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가족과 함께 울고 웃으며, 친구들과 함께 예술을 만들어 내며 소음이 음악이 되어가며 얻어낸 천국이다.


숫자는 줄었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들은 나를 쳐다본다. 인식이 많이 바뀐 게 사실이지만,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그런 사람들, 그런 말들은 여전히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할 게다.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 내일의 감사함이 될 수 있도록.


나의 날개, 이 바퀴를 굴리며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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