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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키 Aug 20. 2021

[영화감상 008] <살인의 추억>(2003)

봉준호 시선으로부터(2) 티끌만 한 불빛마저 범인 대신 형사를 비췄다

두만(송강호)은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며 오로지 '눈'에 의존한 채 본인의 직감을 맹신한다. "딱 보면 티가 나"라고 주장하며 용의자들을 분별할 때마다 본인의 눈을 똑바로 보라고 말하곤 한다. 자만심에 찬 두만을 본 구 반장(변희봉)은 그를 시험에 들게 한다. 강간범과 피해자의 오빠가 나란히 앉아 조서를 쓰고 있으니 둘 중 누가 강간범인지 맞혀보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영화는 두만이 어떤 대답을 하는지 끝끝내 보여주지 않고 끝난다. 심지어 영화가 완전히 결말을 맺은 후 엔딩 크레디트에서조차 두 배우는 '강간범과 피해자 오빠'라는 역할에 나란히 이름이 올라가 있을 뿐 정확한 배역의 구분은 밝혀지지 않는다. 애초에 겉모습으로 분별할 수 있는 근거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만의 수사는 외부의 진실에 집중하지 않고 본인 내부의 확신만을 헛되이 되풀이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그는 연쇄살인범의 수사에 실패했고 15년 후 경찰이 아닌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면서도 변함없이 실수를 반복한다. 아들의 얼굴을 마주한 채로 보기만 하면 네가 하룻밤 동안 무엇을 했는지 안다고 호통을 치고, 동료와 업무 관련 대화를 나누며 다른 직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선 안 된다는 억지 주장을 한다. 연쇄살인 수사 과정에서 증명된 그의 무능함은 경찰 직함을 떼고서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과연 두만이라는 형사 개인의 실패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늘 어둠 속에서 실루엣만 내비쳤던 범인은 네 번째 희생자가 랜턴을 비출 때 아주 잠깐 모습이 드러난다. 공포심으로 치켜든 불빛이 범인이 드러나는 찰나를 비춘 것이다. 이 연쇄살인의 자취를 찾기 위해선 더 강한 빛을 오랫동안 비췄어야 했다. 그러나 국가는 주기적인 소등을 통해 어둠을 조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빈번하지도 않은 빛이 가닿은 곳이 형사 앞이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 불빛에 자꾸 범인이 아닌 형사들이 포착되는 걸까.




이 영화에서 형사들은 극악무도한 범행들이 벌어질 때 엉뚱한 곳에 헛다리를 짚는 '공권력'을 상징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 권력은 무능하고 난폭하기까지 하다. 여러 차례 범행을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사들은 시위를 막기 위해, 또 경찰서 안에서의 다툼 때문에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모든 범행은 논이나 벌판처럼 탁 트인 장소에서 발생했다. 무능하고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권력이 조성하는 공포감은 밀실이 아닌 벌판, 광장,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실패한 것은 두만뿐만이 아니다. 무고한 피해자들이 죽어나간 것은 잔인무도한 살인마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땅의 공권력이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실패 역시 수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어낸 또 다른 악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모두 결실의 계절인 가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황금빛 논으로 시작해 황금빛 논으로 끝나는 장소는 수미상관으로 짝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영화 그 어느 곳에도 이렇다 할 수확은 존재하지 않는다. 벼는 누렇게 익을지언정 그곳은 사람이 살아남는 데에는 실패한 땅이었으며 진실이 드러나긴커녕 들춰낼 수 없는 깊이에 묻혀 버린 땅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이동진이 말하는 봉준호의 세계 (2020)

이전 07화 [영화감상007]<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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