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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키 Aug 20. 2021

[영화감상 009]<괴물(The Host)>(2006)

봉준호 시선으로부터(3) 권력 앞에선 괴물도 약자도 허상에 불과했고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괴물>이고, 영어 제목은 <The Host> 즉 '숙주'다. 한국어 제목에 주목하면 괴물의 난동이 중요해지지만, 영어 제목에 주목하면 괴물의 바이러스에 대한 위험이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결국 극 중 괴물과의 싸움은 두 가지 의미로 나뉘게 된다. 공격해야 하는 대상이 괴물인가, 숙주인가.




한국 정부와 외신들은 괴생명체가 한강을 습격한 이후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통제하는 듯 보였지만 정작 그들이 유도한 건 대규모 헛소동에 불과했다. 괴물은 민간인인 강두(송강호) 가족의 불화살과 쇠파이프 정도로 처리되며 끝을 맞이한다. 만일 군사적 차원에서 제대로 된 무기를 동원했다면 괴물을 무찌르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당장 벗어나려 하는 것은 괴물의 폭력인데 정부와 외신들은 엉뚱하게도 괴물이 옮기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를 발명한다. 그러고선 온갖 보호와 예방 정책들을 들먹이지만 그 대책 역시 결국 그들이 만들어낸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어째서 주류에 위치한 이들은 허상의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일까.

   강두 가족은 괴물과 대결하고, 권력자들은 숙주와 싸운다. 강두가 괴물과 대치하는 이유는 괴물이 딸 현서(고아성)를 삼켰기 때문이다. 현서를 삼킨 것은 바이러스의 숙주가 아닌 괴물 그 자체다. 따라서 강두 가족이 싸워야 할 상대는 '숙주'가 아닌 '괴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괴물에게 피해를 입은 적이 없다. 그저 이 실종자와 사상자가 난무하는 혼란에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피해의 치유나 회복이 아니라 싸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효과다.





괴물의 물리적 해악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체험되기 때문에 강두 가족의 싸움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그러나 권력의 싸움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유해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이러스의 위험을 경계하게 만들려면 우선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믿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정보는 권력이 독점한다. 미디어를 통해 그 정보가 신뢰할 만한 것으로 확산이 되면 공포는 현실화되고 사방은 징후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게 된다. 다들 멀쩡한데 무슨 바이러스가 있는 거냐고 남일(박해일)이 항변하지만 희봉(변희봉)은 "위에서 있다면 있는가 보다 해야지, 어쩔 거냐."라고 대답한다. 정부가 구축한 시스템은 숙주라는 허상과 싸우는 (혹은 싸우는 척하는) 셈이지만, 쇠파이프를 든 강두는 괴물이라는 실체와 대결한다.





권력은 바이러스가 없는데도 있다고 여기지만, 그와 정반대로 현서의 존재에 대해서는 분명히 있는데도 없다고 여긴다. 딸의 전화를 직접 받음으로써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거듭 경찰에 확인을 요청하는데도 "계속해서 이야기가 뺑뺑이를 돈다"는 이유로 간단히 묵살된다. 결국 현서는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괴물에 의해서, 또 한 번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자들에 의해서.



존재하지도 않는데 계속 있다고 그들이 우기는 것은
이른바 하층 계급의 해악성인 셈이다.
그리고 그와 정반대로, 분명히 살아 있음에도 죽었다고 치부하는 것은
하층 계급의 엄연한 생존권이다.
진실로 위험한 것은 있지도 않은 병이 아니라
그런 허상을 향해 제조된 거짓 치료제다.

이동진이 말하는 봉준호의 세계 中



감독 봉준호는 기득권이 진실을 왜곡하고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실현하는 폭력의 방식과 완전한 대치점에 있는 관계를 제시함으로써 영화에 구두점을 찍는다. 바로 약자들이 연대하는 방식이다.

   약자들의 연대는 순환한다. 내가 받은 도움을 준 사람에게 그대로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도움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약자들의 순환이다. 이 선순환은 텔레비전을 보는 현서에게 주는 맥주에서 상상 속 현서에게 건네는 계란과 소세지와 만두로, 거기서 다시 세주에게 직접 차려주는 저녁밥으로 옮겨진다.





영화 <괴물>은 전작 <살인의 추억>과 흡사한 구조로 흘러가는 듯 보인다. <살인의 추억>이 연쇄살인범 대신, 범인이 활개치고 다닐 수 있게 판을 깔아주었던 주역인 공권력을 고발했던 것처럼 <괴물> 역시 하루아침에 나타난 괴생명체가 아닌 혼란을 발판 삼아 입맛에 맞는 당위를 만을 챙기려는 권력자들의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의 궁극적인 도착 지점은 우위를 선점해 괴물과 약자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주류 인사들에게도, 지워진 존재를 되찾으려는 가족애에게도 있지 않다.

   대신 영화는 딸을 잃은 강두가 괴물 사태의 피해자이자 '남 아이'인 세주를 깨워 밥을 먹이는 장면으로 결말을 맺는다. 입맛대로 매체를 휘둘렀던 기득권은 크고 넓은 병원이나 방송국에 한적하게 있을 것이고 괴물에게 피습당해 유해가 된 이들은 한강의 크고 좁은 하수구에 띄엄뜨엄 놓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마지막 장소는 한강 근처의 작고 좁은 사각형 컨테이너 박스다. 당장 내 집이 비좁아도 배고픈 남의 아이를 재우고 밥 먹일 줄 아는, 아니 그래야 하는 단란한 사람들이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인공인 것이다.





*참고문헌
<이동진이 말하는 봉준호의 세계>(2020)

이전 08화 [영화감상 008] <살인의 추억>(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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