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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키 Oct 16. 2021

[영화감상 010]<우먼 인 할리우드>(2018)

영문의 원제는 "This changes everything."

“총 맞는 여자 배우들, 더 많아져야죠.” 헤드라인에 화들짝 놀라 읽게 된 기사는 영화 <마녀(2018)>에 출연한 배우 조민수의 촬영 비하인드 인터뷰였다. 극중 조민수는 주인공 자윤(배우 김다미)에게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악용하려다 복잡한 권력 싸움에 휘말리게 되고 결국 총에 맞아 죽음에 이르게 되는 '닥터 백' 배역을 맡았다. 죽는 장면을 앞두고 총구에 겨눠진 조민수는 남자 배우들로부터 ‘총 처음 맞아 보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액션 씬이 많은 범죄, 느와르 장르는 사실상 남자 배우들의 영역으로 한정되어 왔기 때문에 여자 배우들에게 격렬한 총싸움은 낯설 수밖에 없다. 조민수는 처음 경험해본 액션 연기가 너무 좋았다고 밝혔고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여자 배우들도 총을 맞아 봤으면 좋겠다는, 어딘가 서늘하게 읽힐지도 모를 응원으로 인터뷰는 끝을 맺는다. 나는 이 인터뷰의 어딘가가 늘 가려웠다.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며 대배우라 불리는 이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겨우 ‘총 맞는 연기’가 낯선 경험일 수 있다니. 찝찝하지만 어느 부분을 긁어야 해소할 수 있는 가려움인지는 몰랐었다.


  <우먼 인 할리우드>는 이 이물적인 찝찝함을 구체적으로 또 깊게 긁어내고 있다. 영화는 여성이 지워진 스크린이 얼마나 위험하고 성장가능성이 없는지를 짚어낸다. 미디어는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을 쏙 빼닮았다는 점이 장점이자 동시에 약점으로 기능한다. 흠 잡을 데 없는 미모와 육감적인 몸매를 뽐내지만 여전히 남자 주인공의 배경에 불과한 여자친구 역도, 사랑에 눈이 멀어 목소리를 판 뒤 본인의 욕망을 제대로 발음할 수조차 없는 공주 역도 현실이 아닌 ‘매체’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유해한, 혹은 너무나도 무해해서 유해한 여성상들은 현실의 여성들에게 답습된다. 성별에 대한 관점의 획일화는 그 자체로 폭력적인 사회화이자 비생산적인 사회를 가속화한다. 

    그러나 이는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메세지가 차별적인 것이고 수단으로서 매체가 지닌 확산성에는 차별이 없다. 극 중에서 언급된 CSI효과를 참고해보자. 두텁게 재생산되어 왔던 공주 스테레오타입을 깨부순 여성상(디즈니사의 <Brave>), 혹은 첨예한 전문성으로 빚어진 여성상(CSI)이 드디어 등장했을 때 여성들은 스크린을 거울삼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매체는 여자 아이들이 성인 남성보다 더 열심히 양궁 수업에 몰두하게 하고 실제 법의학자로 일하는 직업여성의 수를 늘어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이것이 왜 매체와 영화가 ‘상영’된다는 것의 무게를 알고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며 더 가치 있고 영감을 줄 수 있는 여성상을 생산해야 하는 이유다. 이는 개인적인 성취를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회경제적인 발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갖고 있다. 백인남성 감독의 비율을 절반으로 줄이면서 컨텐츠의 다양화, 즉 발화하는 주체의 다양성을 확보한 FX 방송국이 2018년 에미상에 50여 개의 작품을 노미네이트한 사례는 오늘날의 제작사와 방송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장 이번 주에 개봉하는 영화에서도 어떤 남배우는 총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급소를 빗나간 총탄에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을 나뒹구는 연기는 어쩌면 약간 추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연기를 하는 여자 배우들을 보고 싶다. 총에 맞더라도 본인의 욕망을 좇다가 다치는 여자 배우들을 보고 싶다. 어떤 여자 아이들을 당장 내일부터 사격 수업으로 향하게 만드는, 그런 여자 배우들을 스크린에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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