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아키 Aug 10. 2021

[영화 감상 005] <산책하는 침략자>(2018)

'앎'만으로는 '삶'을 소화할 수 없다

내게는 무척 소중해서 평소에는 재생할 수 없는 곡들이 있다. 어떤 의미는 가사라는 공간에 다 담기지 못해 단어와 문장 밖으로 흘러넘치곤 하는데 바깥으로 새어 나온 그것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컨디션은 일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을 완벽한 문장으로 설명해달라는 요구가 있다면 부응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어떤 가치는 일정한 도식의 틀에 맞춰 설명될 수 없으니 말이다. 난 때때로 감정 혹은 심상처럼 형태가 없는 것들에 위로를 받고 그 위로를 단맛이 날 때까지 오랫동안 머금은 채 살아간다.




반면 패러다임과 같은 ‘앎’도 삶을 소화해내는 힘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이 세상에서 정보 값을 추출한다. 이를 통해 합리적인 논리를 구축함으로써 패러다임을 도출하고 이는 곧 반박 가능성이 없는 개념이 된다. 영화 속 외계인들은 이렇게 형성된 ‘개념’을 수집함으로써 인류를 종속시키고자 한다. 인류가 정교하게 적어둔 지구 사용설명서를 빼앗아가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피가 흥건한 바닥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오프닝과 상반된 차분한 톤으로 진행된다. 외계인들이 인간으로부터 개념을 빼앗는 과정이 지구 침략의 준비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은 상대적으로 침착하게 보인다. 팽팽한 박진감보다 느린 호흡으로 진행되는 개념 탈취 과정은 오히려 인간을 해방시키는 모습으로 그려지기까지 한다. 집에 칩거해 있던 은둔형 남성은 신지에게 '소유의 개념'을 뺏긴 후 집 밖으로 달려 나와 오히려 신지에게 감사를 전한다. 나루미의 동생은 부모와의 갈등으로 무턱대고 집을 나왔지만 신지로부터 '가족의 개념'을 빼앗긴 집으로 다시 향한다. 제 발로 뛰쳐나온 집으로 향하는 그 발걸음은 어쩐지 가볍기만 하다.


은둔형 외톨이와 나루미의 동생에게 '개념'이란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열리는 ‘문’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에게 '개념'이란 사실상 ‘창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인물들은 도착화된 프레임으로 변화 없는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두 가지 예외가 있고 각 예외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먼저 주인공 신지. 소년, 소녀 모습을 한 두 외계인은 죽지만 한 명의 외계인, 신지는 살아남는다. 두 번째는 기자 사쿠라이다. 개념을 빼앗긴 인간들은 보통 돌발적인 행동과 평소와는 대조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러나 사쿠라이는 개념을 빼앗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개념을 빼앗긴 사람마냥 우발적으로 행동한다. 신지, 사쿠라이 두 인물이 각각 전형적인 외계인, 전형적인 인간에서 벗어나 있는 이유는 그들의 감정 교류에 있다.


인간의 개념을 훔쳐 지구 침략을 분주히 준비하던 아키라, 아마노와는 달리 신지는 동료 외계인들에게 합류하기보다 이미 친밀감 있는 본인의 가이드(사실상 아내) 나루미를 따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개념이 아닌 것, ‘사랑’을 나루미에게 훔치고 여태 수집하던 것, '개념'과는 다른 ‘감정’을 받음으로써 그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개념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사쿠라이가 외계인들에게 영향받았음이 나타나는 부분은 사쿠라이의 웅변 장면이다. 이는 앞서 신지에게 개념을 뺏긴 은둔형 남성의 웅변과 상응한다. 사쿠라이와 외계인은 가이드와 침략자로 관계를 시작하지만 사쿠라이는 유일하게 외계인의 부모를 만나 그의 배경을 이해하며, 아키라의 즉흥적인 살인에 화를 내기도 하고, 아마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감정을 주고받는다. 외계인과 래포를 형성한 유일한 인간인 그는 마치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인다.


신지로부터 '사랑'을 빼앗긴 나루미는 텅 빈 존재로 전락했지만 신지가 처음으로 개념이 아닌 것을 수집했을 때 비로소 외계인의 침략은 종결된다. 사쿠라이는 외계인 가이드로서의 래포 형성에 외적, 내적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사쿠라이가 마침내 낯선 조우자들에게 동화되는 과정은 개념으론 설명될 수 없는 ‘감정’의 존재를 조명하는 영화의 주제와 근본적으로 맞닿아 있다.




설명서가 시키는 대로 사는 법은 쉽다.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설명서를 반기지 않는 이는 없을 테다. 그러나 영화는 그 설명서를 빼앗기기 두려워 떠는 이들에게 묻고 있다. 그 설명서로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앎으로만 삶을 소화하고 있는 건 아니냐고.

이전 04화 [영화 감상 네 번째] <플란다스의 개>(2000)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