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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키 Jul 05. 2021

[영화 감상 세 번째] <미나리>(2020)

잔잔하지만 편안할 수 없는

명성 있는 상이 영화의 진가를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트로피는 아직 발굴되지 못한 감독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기울일 만큼 친절하지 못하다. 칸 영화제는 엘리트들의 사교 파티로 자주 묘사되고 아카데미 영화상은 봉준호의 '텍사스 전기톱'이 뼈 있는 유머로 보일 만큼 '로컬'적이다.

  그러나 <미나리>가 골든글러브상 외국어 영화상을 비롯해 미국 안팎에서 91개의 상을 휩쓸고 배우 윤여정이 여우조연상만 34개를 수상한 화려한 레이스는 기념비적이다. <미나리>의 성과를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만 있다면 농작물이 수평선의 소실점이 되어 사라지는 광활한 대농장을 제이콥 가족에게 선물하는 상상을 해본다.




1  자연, 생태계 그리고 '미나리'

영화에는 순서대로 흙, 바람, 물, 불이 등장한다. (대농장의 토양, 자연재해인 토네이도, 농사를 위한 수로, 모든 농작물을 불태우는 화재가 그것들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의학자인 엠페도클레스가 이야기한 자연의 4원소가 영화의 큼직한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는 생태계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인위성이 배제된 이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고 잔잔하다.


   물은 제이콥(스티븐 연)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미국인 이웃이 효율적인 대농장 운영을 위해 우물파기 서비스를 권유하지만 미국의 토템을 불신한 제이콥은 그 제안을 거절한다. 농사를 위해 가정용 수돗물에까지 손을 댄 제이콥은 결국 결말에 이르러서 이웃의 도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물은 현실을 수용하는 매체로 작용하는 것이다. (+르완다 참사를 다룬 정이삭 감독의 데뷔작 <무뉴랑가보>에서 물은 생명력을 상징한다 이와 연관 짓는다면 물을 '제이콥 가족의 적응'으로 해석하는 것도 타당하다)


   <미나리>에서는 제이콥 가족이 불로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또한 불은 제이콥 가족이 열심히 재배한 농작물을 순식간에 재로 만든다. 이는 폐기의 이미지다. 하지만 영화에서 불은 정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우연한 화재는 작물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갈등을 모두 태워버리고 가족을 결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두드러지는 갈등 해소는 손자 데이빗(앨런 김)과 할머니 순자(윤여정)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일반적인 할머니와 달라도 너무 다른 순자에게 늘 짓궂게 대했던 데이빗은 화재에 대한 죄책감으로 집을 떠나는 순자를 가로막는 첫 인물이다. 미지근하게 이어지던 스토리 중 화재 장면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는데 데이빗과 순자의 변화된 관계를 보며 화재 장면의 필요성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연성을 강조하면 당연히 인위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제이콥이 애써서 키운 농작물을 판매하며 "큰 도시는 믿지 말라"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대도시 외곽 저만치에 떨어져 사는 소시민의 표정이 보이기도 했다.




2  '미나리' 속 종교적 연출

영화에서 가장 돌발적인 장면을 꼽자면 단연코 엑소시즘 씬이다. 어쩌면 공포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이 씬은 철저히 내용의 흐름 중에 '개입'된 장면이다. (시퀀스의 개입) 이 장면으로 제이콥과 모니카(한예리)의 갈등은 격화되는데 제이콥은 장모님인 순자(윤여정)의 건강 문제 역시 본인이 해결할 문제라고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보기 위해 모니카가 샤머니즘에 의존하는 상황 자체에 제이콥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 불편함은 사실 불안함이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 어쩌면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이 엑소시즘 장면이 있기 전 순자는 허공을 보며 보이지 않는 게 있다고 언급한다. 샤머니즘적인 이 대사가 엔딩 시퀀스의 복선이 된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화재로 작물이 불타버린 다음날 이른 아침, 모든 가족들은 잠들어 있지만 순자 혼자서 그들을 바라본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시선으로 말이다. 그 눈빛은 마치 잠든 가족들이 깨어있다 한들 그 누구도 순자와 눈을 마주칠 수 없을 거란 불안한 예상을 하게 만든다.

   제이콥 가족의 유일한 이웃인 폴(윌 패튼)은 아주 노골적인 종교적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우리가 가늠할 수 없을 그만의 마음의 무게를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 '고행의 길'을 걸으며 십자가를 이고 다닌다. 종교의 근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감독의 청교도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더불어 제이콥 가족이 생활하는 트레일러 집을 노아의 방주로 해석한 후기도 인상적이다.




3  제목 '미나리'

영화 제목인 '미나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제목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해석이 있을 수 있다. 먼저 한국이 원산지인 미나리가 미국의 땅을 받아들여 잘 자라난다는 것을 제이콥 가족의 성장과 적응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교적 단순하고 직관적인 해석이다.

   두 번째로 미나리가 기존 가족의 일원이 아닌 가족 외부의 조력자(할머니)에 의해 처음 유입되고 가족의 소유인 대농장 바깥의 환경에 뿌리내렸음에 집중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는 제이콥 가족이 외부 환경과 요소를 받아들였음을, 즉 미국의 환경(우물 찾기 토템 문화)을 받아들여 이국의 땅에 뿌리를 내렸음을 의미할 수 있다.




4  한국적인 영화 vs 미국적인 영화

개인적으로 영화관을 막 나섰을 땐-와 이렇게 한국적인 이야기가 외국영화제에 통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조연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이 상당히 한국인스럽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제이콥은 말 그대로 '한국의 가장' 역할을 수행하며 가장으로서의 막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아내 모니카도 마찬가지로, 극 중에서 상대역에 상관없이 그가 가장 많이 언급한 대사는 "내가 책임질게"이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할머니 순자다. 순자는 딸 모니카 집에 찾아와 그들이 어렵게 살림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아무런 집안일을 돕지 않는다. 그가 가사노동을 시작하게 된 시점은 바로 그가 아프고 나서부터이다. 이는 '아프면 짐이 된다'라는 사고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가족의 일원으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소속감에 대한 욕구를 잘 보여준다. 가족의 단합적인 이미지를 한국적인 것이라고 치환해버리는 비약을 저질러선 안되겠지만 <미나리>의 배경을 동시대 한국으로 바꿔도 제이콥 가족의 태도에 전혀 이물감이 없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미나리를 미국적인 영화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가족 내에서 제이콥이 취하고 있는 스탠스는 '개척자', 순자는 '한국 전통' 그리고 아들 데이빗(앨런 김)은 'Korean American'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인물인데 이러한 캐릭터 구성은 2-3세대 이민자 이전의 1세대 이민자의 이야기에 가깝다. 그리고 미국 영화의 대전제가 family first라는 점에서도 이 영화를 한국적인 영화라고 판단한 앞선 내 감상을 관철시키기엔 무리가 있다. '~스러운'이라는 수식어를 쉽게 결정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미나리>를 '보편성에 대한 영화'라고 이야기한 봉준호 감독의 평가가 현명했음을 깨닫게 된다.




5  엔딩

엔딩에 대한 평이 대조적으로 갈려 양 측의 의견을 지켜볼만하다. 마지막 장면의 시퀀스는 크게 다음과 같다.


화재가 멎은 후 잠든 가족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표정

> 미국 토템을 받아들여 새 우물을 개발

> 할머니 순자가 심은 미나리의 희망


결말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지나치게 요약해 심심했다는 평과 깔끔하고 명료한 엔딩에 오히려 여운이 남았다는 평이 있다. 사실 동일한 의견에 뉘앙스만 다른 듯 하지만 나는 후자에 힘을 싣고자 한다.


   잔잔한 서사 속 명확한 변화가 영화의 전체적인 톤을 거스르지 않으며 표현된 게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제이콥은 영화 초반에 미국 토템을 이용한 우물파기를 거절하며 부인 모니카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진지한 모습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의 토템을 인정하게 된다.


   두드러지는 발전 혹은 스펙타클한 성공담 없이 '갈등의 해소'만을 조명한 것이 미나리스러웠다.




6  좋았던 것들

연기의 영역으로 분류되기엔 애매한 요소들이야말로 관객의 몰입을 돕는 주역이었다. 특히나 눈에 띄었던 건 '호칭'이다.

   윤여정 선생님은 단 한 번도 데이빗을 이름으로만 부르지 않는다. 정말이지 '한국 할머니'스러운 "데이빗아"라는 호칭은 처음 들었을 땐 어색했지만 그 부름의 형태가 반복되자 오히려 "데이빗"이 낯설어졌다. 특정한 호격조사가 없는 미국에선 그냥 "David"이라고 번역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제이콥과 모니카도 둘의 이름보다 '지영 아빠', '지영 엄마'라고 더 자주 언급되는 사소한 구체적임이 좋았다. 역시 미국에선 본명으로 해석되었다는 점이 안타깝다.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를 전달할 수 없다니 말이다.



미나리는 기어코 미국의 땅에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렸지만 제이콥 가족은 불안정함에 산다. 의도치 않은 화재에, 은은한 인종차별에 미나리의 뿌리가 언제 뽑혀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불안정함에 말이다. 흙, 바람, 물, 불로 '금'을 만들고자 했던 가장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버리고 그 미미한 성과에 대한 한 가족의 방황은 거창한 결실 없이도 잔잔하게 이어지는 가족의 결속으로 귀결된다.


어떤 잔잔함의 이면은 결코 편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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