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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의 담소 Oct 02. 2024

애미 닮은 딸 VS 이 씨 집 안 자식

내가 명절에 어디도 가지 않는 이유

 이혼으로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을 뽑자면, 개인적으로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이혼이 무조건 자식에게 죄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은 이혼이 이전보다는 흔해지고, 인식이 많이 변화되었다. 그렇다면 그 인식 변화에 자식들의 상황도 변했을까?


 이혼에 관해 상처를 받는다면, 사람들은 밖에서 듣는 욕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준 것은 외부인들의 흉이 아니다. 오히려 외부인들은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말을 하면, "어머,, 미안해 몰랐어"라고 사과를 했다. 물론 나는 그 사과가 정말 화가 났다. 안타까운 마음에 사과를 한 것이겠지만, 보모님의 이혼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혼은 어른들의 일이었다. 물론 피해는 고스란히 나에게 왔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혼으로 가장 자식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누구인가. 어이없지만 가족이었다. 어릴 적 나는 명절을 좋아했다. 외가를 가든 친가를 가든 나는 막내로서 이쁨을 받았다. 명절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좋아했고, 집에 돌아갈 때면 바리바리 싸주시는 음식이 든든하고 좋았다. 그런 나에게 명절이 부모님의 이혼 결정으로 단숨에 지옥이 되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거라는 말과는 달리, 명절의 분위기는 바로 바뀌었다. 이혼 결심 후에 바로 서류에 도장은 찍지 않았지만, 명절에 엄마는 친가에 가지 않으셨다. 친가에 가는 차 안에서 아빠는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셨다.

"나라고 부모님 보러 가는 명절에 며느리도 없이 이렇게 가고 싶겠어. 아빠도 며느리랑 자식이랑 명절에 오순도순 가서 화기애애하게 오고 싶어."

무슨 대화를 해서 이런 말을 하셨는지 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이 말 한마디로 나는 가기 싫은 친가에 몇 년은 더 가야만 했다. 적어도 나만큼은 아빠의 자식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리 다짐하며 아빠가 더 슬퍼하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그 말이 내내 나에게 족쇄가 되어왔다.


 이쯤에서 그토록 나를 아끼신 친할아버지가 있는 친가를 왜 안 가고 싶어 졌냐고 묻는다면,, 사건은 이러했다. 엄마 없이 친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짐을 풀고 앉았다. 아빠는 가족들과 인사를 하러 거실에 있었고, 나랑 오빠는 고모 방에 앉아 TV를 보려고 했다. 친할머니는 오빠 보고 나가있으라고 했고 고모와 친할머니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엄마 아빠가 둘이 같이는 자시니?" "혹시 네가 엄마랑 자겠다고 떼써서 둘 사이가 저렇게 된 건 아니니?"

나의 나이는 고작 해봐야 만 11~12세였다. 그러나 친할머니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보태며 고모가 한마디를 던졌다.

"너는 볼 수록 지 애미랑 똑같이 생겼다."

이 타이밍에서 엄마와 닮았다는 말은 곧이곧대로 칭찬으로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몇 해를 더 친가에 갔지만, 결국에는 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여자인 내가 엄마도 없이 친가에 가기 좀 뭐 하다는 그런 핑계를 둘러 되면서. 친가에 가지 않으면서도 아빠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안 가면 이제 아빠의 명절은 더더욱 쓸 쓸 해지겠구나 하고. 그리고 내가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가족에게 더 이상의 상처와 분란은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런 말을 명절 때 들었다는 것을 부모님이 알리게 된 때는 뒤늦게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이다.


 그렇다면 외가에서는 내가 마음 편히 있었을 수 있을까. 아직 생각해도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빠에게 장남의 권한을 주면서, 온갖 구박과 질문은 나만 들었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도 옆에 앉은 오빠를 제치고 나의 곁에 앉아 물으셨다.

"엄마랑 아빠 사이 요새 어떠니?""네가 괜히 둘 사이 방해하면 안 된다"

정말 놀랍게도 결이 같은 질문을 받고선 나는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혹시 두 분의 이혼이 나의 잘못인가? 내가 조금 더 착한 딸이었다면. 내가 조금 더 집안 분위기를 잘 살렸다면 면. 일이 이렇게 까지 안될 수 있었던 걸까?'


 다행히도 외할머니는 나에게 애비 닮은 딸이라는 말은 안 하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씨 집안 자식이라는 말을 나는 엄마에게 오래도록 들어야 했다. 원인은 엄마의 갱년기 때문이었다. 나는 엄마가 힘든 가정환경에서도 나름 바르게 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환경에서 바르게 자라기 쉽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문제는 엄마가 이혼까지 겪게 되며,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팔자를 탓하며 늘 하던 말은 "남편복이 없으면 자식 복도 없다더니. 지긋지긋한 이 씨 집안 식구"였다.


 나는 어디에도 마음 붙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만 28살. 설과 추석. 1년에 2번 있는 대대적인 한국의 명절. 나는 아직도 명절이 싫다. 이번 추석에도 여전히 그 흔한 명절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다. 남들은 명절 때 살이 찐다던데, 나는 살이 고작 닷새동안 2킬로가 빠졌다. 애미 닮은 이 씨 집안 자식은 여전히 명절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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