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자녀가 여럿 있는 집에서 한 자녀가 혼날 때, 다른 자녀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며 칭찬을 갈구하는 장면 또는 집안일을 도와주었다며 자신의 대견한 일을 보여주려고 하는 장면. 그 상황의 이유를 모두 다 같은 이유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이가 불안한 상황이라면, 아이들은 자신의 쓸모를 자신이 버려질까 또는 내쳐질까 봐 증명을 하려는 행동일 수 있다.
나의 부모님은 몰랐다고 이야기하시지만, 어릴 적 난 눈치를 많이 보았다. 집안의 분위기가 삭막하거나 오빠가 혼날 때면 더욱이 나는 스스로의 가치 증명을 하고자 했다.
한 번은 아빠가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굉장히 크게 화를 내신 적이 있었다. 엄마는 아빠의 짐과 겉옷을 받아주며 다독여주고 계셨다. 그래서 아빠를 기쁘게 하고자 학교에서 칭찬받은 그림을 보여드렸다. 그러자 아빠는 굉장히 화를 내며 "이게 그림이야? 이런 어린애들 그림을 내가 칭찬해 주길 바라니?"라며 바닥에 던져버리셨다. 아빠에게는 어른들만의 굉장한 힘든 상황이 있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나의 행동은 만 9살짜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또는 오빠가 혼이 나는 상황이면, 나는 엄마에게 달려가 집안일을 도와주겠다며 애교를 부렸다. 오빠가 혼이 나니 이때다 싶어 애정을 독차지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오빠가 혼이 나는 상황을 보다가 나도 말을 안 듣는다면 나마저 버려지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의 행동은 "착한 딸이 될게요. 말을 잘 들을게요.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마세요."라는 처절한 생존의 의미였다.
아이들은 분위기나 자신의 상황을 모르지 않는다. 단순히 순진하고 순수하지만은 않다. 작은 일화를 이야기하자면, 주말 아침 엄마가 밥을 해주겠다고 하신 적이 있다. 오빠는 늘 핫도그가 먹고 싶다고 했고, 나는 이번만큼은 샌드위치를 먹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핫도그를 해주신 걸보고 ‘오늘은 샌드위치가 먹고 싶었는데, 맨날 오빠가 먹자고 하는 것만 해줘’라며 투정을 부렸다. 그러자 엄마는 나를 집 밖으로 쫓아내셨다. 항상 안 먹겠다고 투정을 부린 것도 아니며, 핫도그가 이젠 물릴 것 같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그 말 한마디로 나는 집에서 쫓겨났다. 계단에서 울면, 울리기 때문에 주민들이 시끄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파트를 내려가 입구 앞에서 엉엉 울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제 어디서 살아야 하지? 그래도 의무교육인 중학교까지는 졸업을 해야 먹고살 수 있을 텐데.. 친가는 차 타고 가야 하니까 멀고, 가는 법을 모르지만 외가가 가까운데.. 외할머니는 엄마의 엄마니까 날 안 받아주겠지? 그럼 학교에서 살까? 대충 씻고 자고는 해결될 것 같은데”
지금 와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딱 초등학교 2학년의 생각이었지만, 30분간 엉엉 울며 살길을 강구하던 나는 진심이었다. 30분 후에야 오빠가 계단을 내려와 날 데리고 들어갔다. 사실 엄마와 오빠는 내가 계단을 내려간 걸 모르고 처음엔 놀랐다고 한다. 그 짧은 사이 내가 밖으로 나가서 살 궁리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 못한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아이들은 가정의 불화를 눈치챈다. 그리고 눈치를 볼 것이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 말이다. 고등학교 때는 집에서 종종 쫓겨났다. 무언가를 잘못해서라기 보단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는 엄마가 주말이면 약속도 없는 나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또는 싸우면 집에서 나가 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러면 난 교회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거나 때론 고시원을 알아보아야 했다. 집은 나에게 온전한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이혼은 사랑하는 가족의 해산을 넘어, 생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