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장마철에 접어든 7월의 어느 날.
쉬는 날 하루 종일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온전히 쉬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영화 보고 끼니를 챙겨 먹고 오랜만에 늘어지게 낮잠도 자고 틈틈이 정해놓은 루틴들도 빼놓지 않고
하다 보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바깥은 여름, 매섭게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와중 문득 예전에 즐겨 듣던 라디오의 오프닝 곡이 생각났다. 속 시끄럽던 시절 가사 없는 멜로디만이 듣기 편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우연히 알게 된 93.1 MHz KBS CLASSIC FM ‘세상의 모든 음악, 전기현입니다.’
당시 제시간에 라디오를 들을 수 없었을 때에는 유튜브로 올려주셨던 분 덕분에 다시 듣기를 했었고
시간을 맞출 수 있을 때에는 5시 57분 언저리부터 채널을 맞추고 온전히 눈을 감고 감상하기 위해
6시 땡 하면 들려오는 오프닝곡에 귀를 기울였다.
특유의 나긋나긋함 덕분에 오프닝멘트들은 언제나 귀를 편안하게 해 주었고
그 뒤로 흘러나오는 세상의 모든 음악들은 내 플레이리스트를 꽉 채워주었고 듣는 음악의 폭도 넓어졌다.
언젠가는 퇴근 시간이 다 되어 매장에서 라디오를 켜두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같이 계셨던 고객님께서 본인이 예전에 힘들었을 때 위로가 되었던 라디오라며 추억에 젖어 반가워하기도 하셨다.
오랜만에 들어도 마음이 뜨끈해지는 음악이 있다는 건 참 좋다.
어렸을 적 작디작은 내 공간은 겨우 방 한 칸이었을 때 고요한 방 안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라디오.
어쩌다 라디오를 듣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신화 팬이었고 멤버 중 한 분이 디제이였던 터라 챙겨 들었던 것 같다. 그 프로가 끝나면 자정에 정지영 아나운서의 라디오가 시작되었는데 목소리가 밤공기와 제법 잘 어울렸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어딘가의 저편 너머로 잔잔하게 기억된다.
그러던 어느 날.
차가 생기고 아침 출근길 우연히 들었던 라디오가 있다.
바로 91.9 MHz MBC FM4U 채널의 ‘오늘 아침 정지영입니다.’
어?! 내가 학생 때 들었던 그 아나운서 정지영 님?
맞았다.
밤에 듣기도 좋았는데 과연 아침이랑도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오늘 아침 정지영에서는 대표적으로 뚜뚜루송이 있는데 본업 가수부터 연예인분들,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온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문은 단연 귀여운 아기들의 뚜뚜루송.
옹알거리고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혼자 키득거리면서 운전하다 말고 귀여워 미친다.
'지영이 이모'를 다양한 버전으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이랄까.
라디오의 장점 중 하나는 다양한 사연들을 들으면서 흘러가는 세상 속 따듯함을 느낄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추억에 젖어있던 옛 노래들을 소환할 수 있다.
어느 날은 좀 심각하리만치 청취자들과 나의 온도와 취향이 맞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소름이 쫙 돋는다.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한다는 게 너무 반가운 사람들이 된다.
화요일의 눈치 게임이나 신청곡에 당첨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래도 좋다.
다른 청취자들의 신청곡이 나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고 커피는 내가 사 먹으면 되니까.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한다는 건 행복해지는 길이고
출근길의 행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