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2005년.
소녀감성 풍부했던 그 시절의 나는 17살 사춘기 소녀였다.
그 당시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가 하나 있었다.
레스토랑 사장인 젊고 잘 생긴 남자, 파티시에인 연상의 여자, 그리고 예쁜 전 여자친구가 주인공인
바로 ‘내 이름은 김삼순’이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명장면이 수두룩하지만 그중 제일 잊히지 않았던 장면은
삼순이가 한라산을 오르는 장면.
비바람이 몰아쳐도, 힘들어 죽겠어도 어떻게든 해내고야 마는 장면.
그 시절 그 장면을 보며 꿈을 꾸었다.
언젠간 나도 한라산을 정복하리라.
출발 한 달 전 한라산 방문을 위한 예약은 미리 마쳤다. 일단 예약하고 보자는 심보였다.
10월 20일은 친한 동생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다음날과 그다음 날은 내가 쉬는 날이었다. 그런데 결혼식은 오후시간대라 다시 일하러 나가기 애매한 상황이었다.
이틀 전까지 고민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녀오자 싶은 마음으로 티켓을 구매하고 출발 당일 제주발 비행기에 내 몸을 실었다.
오직 한라산만을 목표로 다른 일정은 아예 잡지 않았다.
일요일 저녁에 도착해 등산에 필요한 장비를 빌려주는 가성비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은 하루 종일 산행을 한 뒤 비교적 넓고 쾌적하면서 부담스럽지 않은 호텔을 예약해
맛있는 저녁과 좋아하는 제주 생막걸리 한 잔 하면서 쉴 요량이었다.
그리고 화요일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든든하게 한 끼 챙겨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결혼식은 신도림역, 식만 보고 곧바로 김포공항으로 향해야 했던 나는 짐도 많고 마음도 바빴다.
결국 모든 일정을 소화해 내고 딱 떨어지게 비행기 탑승 10분 전에 공항에 도착했다.
숨을 고르며 하루 종일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
이렇게 스케줄 짠 과거의 나야 왜 그랬니.
그래도 비행기 안 놓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제주에 도착하니 이미 어둑해져 있었고 게스트하우스 근처엔 편의점 하나 달랑있었다.
한라산에 가지고 갈 간단한 간식거리와 맥주 한 캔을 사 저녁으로 때웠다.
산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지친 나머지 배고픔도 잊었다.
한라산에 오르기로 한 날. 캄캄한 새벽 게스트하우스에서 한라산 입구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 덕분에
편하게 도착했다.
새벽 5시 55분부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나는 내 무릎과 체력을 믿고 그동안 운동했으니까, 천국의 계단도 열심히 탔으니까라고 생각하며 무턱대고 계단 많다는 관음사 코스를 골랐다. 비교적 완만하다던 성판악 코스는 지난번에 한 번 다녀왔다. -강풍주의보로 인해 속밭대피소까지만- 경험해 보니 돌계단은 나와 맞지 않았다.
그런데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정말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한라산에 내게 알려준 것.
사람들은 생각보다 친절하고 따뜻하다.
올라가면서부터 무릎 통증이 심했다. 그 모습을 보신 어르신들이 그냥 지나쳐갈 수도 있었는데 무릎 컨디션 살펴주고 그 모습을 본 다른 분은 가방에 혹시 파스 있나 찾아보겠다 하시며 이내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아니 왜 미안하신 건가요. 제가 감사할 따름이죠.
비가 온다던 날이었는데 잠시 햇살이 내리쬐면서 시원한 바람이 불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오르는 길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존재만으로 이토록 힘이 나게 해 준 나의 우주 덕분에
백록담까지 갈 수 있었다.
해발 1700 미터에서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의 250미터 정도는 거의 기어간 듯하다.
그렇게 힘을 내 막상 정상에 오르니 비바람이 치고 있었고 뿌연 곰탕에 즐길 풍경 하나 없었다.
백록담이고 뭐고 배고파 죽겠다는 생각뿐.
밥부터 먹고 인증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부분통제 없이 끝까지 오를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또 하나 생각보다 많은 외국인들을 봐서 놀랐다. 마침 요즘 영어 공부 중인데 중간중간 말을 걸어오면 전보다 덜 당황하는 나를 발견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스틱이 자꾸 말썽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짤막한 스틱에 지탱해 겨우 내려오고 있었는데
'어이 학생' 부르시며 스틱을 매만져주셨다.
그 와중에 만 34세에 학생 소리 들으니 기분은 좋더이다.
오르고 내려오며 네 번 정도 울컥함이 밀려왔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다가 이내 또 뿌듯했다.
다녀오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꿈도 생겼다.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책이 최근에 드라마와 영화화되었다. 드라마는 나오자마자 정주행 해버렸다. 알고 보니 작가님이 각본도 쓰셨다. 대단하고 멋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과 각본이 동시에 가능하다니.
내년이 될지 혹은 몇 년 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내가 쓴 소설이 잘 되고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참 좋겠다. 남자주인공은 이미 내 마음속으로 정해두었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망상이라 해도 좋다.
백록담을 마주했을 때 한라산이 나에게 알려준 또 한 가지가 있다.
속도는 더딜지라도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어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