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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나샘 May 10. 2021

나에게 5월 8일은 가슴 아픈 아버지 기일이다.

푸르고 찬란한 5월, 아버지를 용서하다

 5월 8일은 어버이날이다. 하지만 그날은 잊을 수 없는 친정아버지 슬픈 기일이다.


중학교 1학년, 5월 8일 학교에서 중간고사 시험을 보고 있었다.

"00야, 잠깐 나와볼래? "

"네? 선생님?"

 "너희 어머니께서 연락이 왔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단다." 하며 소식을 전해주셨다.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중간고사 시험을 치르다 말고 울면서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군대 간오빠를 기다렸다. 군대에 있는 오빠도 아버지 부고 소식에  연락을 받고  휴가를 받아 나와 동생을 데리고 큰집 시골로 내려갔다. 큰집 시골로 내려가는 도중 오빠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오빠는 다 커서도 아버지께  혼나고 맞았다.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가겠다는 오빠를 아버지는 대학 가지 말고 아버지를 대신해 직장에 취직하라고 혼을 내시고 때리셨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누구보다 클 텐데  눈물 흘리며 흐느끼는 오빠를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시골 큰집에서  임종을 앞두고 어머니와 먼저 요양을 하고 계신 상황이었다.

 평생을 술로 사신 아버지는 간에 복수가 차는 간경화(간이 굳어가는 병)로 이병원, 저 병원 전전긍긍하시다 결국 시골 큰집에서 임종을 준비하러 가셨다. 그랬던 아버지께서 시골로 내려간 지 얼마 안 되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죽도로 싫었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아니 1도 해내지 못하셨다. 한평생을 술로 사신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상처만 남기셨다. 술만 드시면 밤새 소리를 지르고 술주정하시는 아버지 때문에 이 산동네에서 저 산동네로 쫓기듯 이사를 다녀야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대신 가녀린 어깨에 가장의 총대를 셔야 했다. 힘겹게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일을 하셔야 했다. 식당일, 지하철 청소, 공장 미싱일...

요즘 말로 투잡, 쓰리잡을 하셔야 했다. 홀로 5남매를 키우셔야 했다. 그렇게 본인 삶은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치열하게 고군분투하시며 살아내셔야 했다. 새벽마다 주방 한편에서 숨죽여 우시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어린 나의 마음도 주저앉았다. 이런 엄마의 모습을 마주할 때면 더욱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새벽에 나가셔서 늦은 밤이 되어서야 퇴근하시는 엄마를 보며 우리는 자라야 했다.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 컸고 따뜻한 사랑이  고팠던 우리 자매는 늘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



우리 가족을 그렇게 힘들게 하셨던 아버지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는데, 막상 돌아가셨다고 하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슬픈 감정이 들긴 했지만 아버지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다는 해방감과 안도감이 훨씬 더 컸다.

'아버지 때문에 쫓기듯 이사 안 다녀도 되겠지?'

'이젠 아버지 때문에 힘든 일은 없겠지?' 

'이젠 우리 엄마 안 힘들어도 되시겠지?'



고속버스로 5~6시간을 달려 시골 큰집에  도착했을 땐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엄마는 많이 우셨는지 눈이 퉁퉁 부어 계셨고, 그 옆에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아버지의 관을 지키고 계셨다. 큰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며 나를 보자마자 손을 덥석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00야, 너희 아버지께서 눈을 감기 직전 네 이름을 그렇게 불렀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렇게 원망하고 미워했던 아버지께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실은 그랬다. 아버지는 1남 4녀 중 딸 중에서는 셋째인 나를 제일 예뻐하셨다. 왜냐하면, 내가 제일 아버지 말을 고분고분 잘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술 심부름,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위에 언니들이 하기 싫어하면 내가 그냥 알아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공부도 제일 열심히 하고 잘해서 칭찬을 많이 들었다.


어릴 적 늘 들었던 말이 있다.

"우리, 셋째 딸 공부도 잘하고 착해서 예쁘다" 이 말을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서 나는 늘 그렇게 착하게 살아야만 하는 줄 알았다. 이 말이 내재화되어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렇게 순응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칭찬에 점점 지쳐갔다. 아버지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착한 딸이라는 그늘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가족에게 상처와 고난만 주는 아버지가 죽도록 싫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버지가 안 계셨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초등학교(국민학교) 5학년 어느 날, 나는 아버지께 울면서 말했다. "아버지,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잖아요. 가족들이 너무 힘들잖아요.", "아버지 건강 생각해서 술 그만 드세요. 그리고 일도 하셔야 하잖아요."  그 아버지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노력하셨지만, 술병으로 인해 3일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셔야 했다. 그 이후 더 술만 드셨고, 결국 병이 커지고  알코올 중독으로 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나를 예뻐하셨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아버지와의 살가운 추억이 없다. 가족들과 따뜻한 가족여행? 언강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나에게 아버지란 그저 두려운 존재, 가족에게 고통과 상처만 주는 악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친구와 친구 아버지가 친구처럼  살갑게 말도 하고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를 딸처럼 친근하게 대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친구와 친구 아빠의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라고 한없이 부러웠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와 살갑게 대화를 해 본 적도, 눈 맞춤을 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딴 세상 이야기였고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 8일 아버지 기일이 돌아왔다. 손 마디마디가 굵어지고 한없이 거칠어진 손으로 친정엄마는 아버지 제사상 음식을 준비하시고 정성스레 차리신다. 친정엄마께 물었다.

"엄마, 아버지는 엄마 그렇게 고생시키셨는데 아버지 제사상 차려 드리고 싶으세요? 아버지 안 미우세요?"

(사진;서나샘)


 

"왜 안 미웠겠냐? 지금도 엄마 고생한 것 생각하면 한이 되고 서럽다"

"근데 어쩌겠니?, 그게 아버지의 삶이었고 내 복이고 받아들여하는 삶이었던걸" 하시며 담담히 되뇌셨다.


딸인 나도 그렇게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는데, 능력 없는 남편의 아내로서 살아내셔야 했던 엄마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싶다.

"엄마, 진심으로 감사해요. 그 고되고 힘든 세월 참고 우리 잘 키워주셔서요."라고 말씀드렸다.

"엄마가 일하느라 해준 것도 없는데, 너희들이 잘 컸지"라고 담담히 말씀하신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아버지께 받지 못한 사랑 저희가 다 채워드릴 수는 없지만, 자식으로서 도리 열심히 하도록 노력할게요.'

'엄마,  건강하게저희들 옆에서 오래오래 계셔 주세요'


세월이 흐르고 성인이 되고 부모가 되고서야 아버지의 살아오신 일생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버지 묘를 이장하면서 큰아버지께 아버지의 안타까운 삶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 시점에서 아버지의 삶을 돌이켜 보니 아버지가 그렇게 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절대 용납,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의 삶이 이해가 더해졌다. 그토록 심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미움도 많이 옅어져 갔다.


푸르른 녹음과 따스한 햇살이 찬란히 빛나는 따스한 5월, 그와는 반대 영역이었던 나의  14살 5월은 아픔.

이젠 아픔의 끈을 놓으려 한다. 기억 저편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아버지의 아픔과 상처를 말이다. 그리고 용서의 끈을 잡고 멀리 떠나보낸다.

(사진:서나샘)

아버지, 마지막 임종을 지켜 드리지 못한 것이 정말 죄송하다. 유독 나를 예뻐해 주셨는데, 그땐 그 이쁨이 그토록  싫었을까? 셋째 딸을 향한 사랑의 크기보다 가족들이 받아야 했던 상처들의 크기가 너무 컸기에...



아버지, 이젠  당신의 삶을 이해하고 용서하려 합니다. 부디 그 하늘나라에서는 그 어떤 아픔과 상처 고통도 없이 편히 건강히 잘 지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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