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나 믿지?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논술을 가르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때마침 남편이 육아 휴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아직은 그렇다 할 수입이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임신 기간을 기점으로 너무 바빴던 남편은 아이와 추억이 별로 없고
새로 일을 시작하면서 친정 엄마나 다른 사람의 손길이 너무 필요했던 건 둘째고-
지금 쉬지 않으면 회사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 대신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남편을 보게 될 것 같아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케이! 했다.
육아 휴직의 ‘직’ 자를 다 꺼내기도 전에 남편은 인사팀장으로부터 퇴사를 권유받았다.
인사팀장 왈 우리 회사에 남자 육아휴직 사례는 딱 두 번 있었다.
회사에 앙심을 품고 뭣 돼봐라. 하고 퇴사 대신 육아휴직을 쓴 경우 하나.
너무나도 능력 있는 와이프를 둔 여러모로 훌륭한 직원이 있었는데 아내가 해외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
퇴사하고 아이 보겠다는 거 회사 쪽에서 잡고 잡아 육아휴직을 쓰게 했다나 뭐라나.
인사팀장은 남편에게 물었다고 한다.
외벌이라 하지 않았나. 아이 생각은 안 하는가. 회사에서 이미 긁은 복권인데 육아 휴직 후 그 복권을 또 긁고 싶겠는가.
깔끔하게 퇴사를 하고 이직 준비를 하는 게 가족을 위해서도 회사를 위해서도 좋지 않겠는가.
결혼 전 근무했던 직장에 40대 중반 남자 차장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없는 곳에서 부하직원은 물론 팀장님께서도 차장님과 의견 충돌이 있는 날이면
어차피 그만 두지도 못할 거면서 큰 소리는. 외벌이래 얘 둘인데 가긴 지가 어딜가냐는 말이 차장님 모르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실은 나도 그때 그 차장님을 내심 무시했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아내를 생각하며 남편이 회사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긴 알까… 혀를 찬 적도 있다.
세상사 공평하기도 하지.
내가 했던 말들이 돌고 돌아 내 남편과 나를 향해 다시 돌아오는구나…
아주 잠시 나는 김은희 작가가 되는 꿈을 꿨다.
아주 잠시 나는 이효리가 되는 꿈을 꿨다.
유퀴즈에 인터뷰를 하며 제가 이렇게 단기간에 성장하게 된 건 남편 전 직장 인사팀장 때문이죠.
멋들어지게 인터뷰하는 꿈을 꿨다.
현실에서의 나는 아파트에 학원 전단지를 돌리고
놀이터 아이들에게 아이들과 함께 온 어머니들이 언젠가 내 고객이 될지도 모른다며 상냥하게 웃음을 날리는
정말 뭣도 없는 애 엄마라… 남편에게 해줄 말이 딱히 없었다가 문맥상 맞겠지만,
이 한 몸 죽고 죽어도 입은 살아 움직일 거라는 지인들의 말만 따라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돈이 없지 할 말이 없겠냐
남편의 말을 다 듣고 난 뒤 나는 남편 눈이 커지도록 듣도 보도 못한 욕을 일단 인사팀장에게 날려줬고
“오빠, 나 못 믿어?”를 몇 번이나 묻고 또 물었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오빠가 나 먹여 살렸는데 이제 내 차례지.
이번에는 내 차례니까 순서지켜.
우리 아이의 세 살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
그리고 육아휴직이 끝나도 그곳에 돌아가지 마.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줄게!
큰 소리로 호언장담 했는데……………….
나.
뭐.
돼?
천 냥 빚은 말이 아니라 돈으로 갚고 싶은데…
외벌이 하면서 한 번도 힘든 티 낸 적 없는 남편한테 이번에는 나도 좀 힘이 되어주고 싶은데…
무엇보다 은혜는 못 갚아도 원수는 꼭 갚고 싶은데 나 진짜 뭐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