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C에서 경험한 공동체 감각
덴마크에는 만 17세 이상이면 누구나 갈 수 있는 학교가 있다. 전공도, 시험도, 필수 재학 기간도 없는, 한 학기 단위로 원하는 만큼 다닐 수 있는 특이한 학교다. 지식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스펙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데 여기를 다녀온 분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 경험이 내 삶을 바꿨다'고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들인 북유럽 국가들에 대한 궁금증은 전부터 있었고, 거기에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만큼 멋진 학교가 있다는 정보는 나의 호기심을 엄청나게 자극했다. 찾아봐도 딱히 많은 정보가 나오지 않고, 거기에서 배운 지식이 아니라 그곳에서 경험한 문화가 삶을 바꿨다고 하는 것이니, 이건 직접 가보지 않으면 평생 알 수 없겠다 싶었다. 어차피 퇴사도 하겠다, 이 때 아니면 언제 가겠나 싶어서 덴마크 한 달 살이를 결심했다. 덴마크에 인생학교를 다녀온다고 하니 다들 '그게 어떤 학교냐'는 질문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저도 잘 모르겠어서 가보려고요'라며 대책없는 답변을 했는데, 정말로 그게 진짜 이유였다.
이 학교의 정체는 '폴케 호이스콜레'다. 학교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종류라고 이해하면 되는데, 덴마크에는 이 '폴케 호이스콜레'가 70여개나 있다. 그 중 내가 간 학교는 'IPC(International People's College)'라는 유일한 국제학교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실제로 내가 있었을 때에도 유럽, 미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호주까지 정말 다양한 국가의 학생들이 모였다. 물론, 비율의 차이는 있었지만.
IPC는 국제학교인 만큼 글로벌 학생들을 위한 설계가 되어있지만 덴마크 본연의 문화를 느끼기엔 조금 아쉽고, 다른 학교들은 덴마크 사회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할 수 있는 대신 대부분 덴마크 학생들로 구성된 학교에서 몇 없는 아시안이 되어야 한다고 들었다. 둘 다 장단이 명확했지만, 사실 한 학기가 아닌 한 달 코스를 제공하는 학교는 내가 찾아봤을 때는 IPC밖에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자유스콜레에서 매년 보세이 폴케호이스콜레와 협력해 한달살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아쉽게도 나는 일정이 맞지 않아 그 옵션은 고려할 수 없었다.) 나는 7월 24일부터 8월 13일까지, 3주 간의 랭귀지 코스에 참여했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온 지 딱 한 달이 됐다. 더 늦기 전에 그곳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기록해보려 한다.
폴케호이스콜레의 참맛(?)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최소 한 학기는 있어야겠구나 싶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학교와 덴마크 사회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덕분에 그 곳에서의 경험이 학생들에게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나름대로 알 것 같았다. 포인트는 숙식을 함께 하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전인교육이다. 거기에 IPC는 전세계에서 온 학생들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친구가 되어가다 보니 세계시민교육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지난 4년간 의성에서 짧으면 2달, 길면 반년 간 참가자들과 함께 살면서 나 스스로가 변화한 부분, 참가자들이 변화한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동일한 느낌을 덴마크에서도 받았다.
의성에서의 생활과 덴마크에서의 생활은 비슷한 점이 정말 많았다. 기숙사 생활을 하고, 공간 청소도 함께 하고, 일과 삶을 다 함께 하기 때문에 24시간 붙어있게 되고, 타지에서 와서 그 지역에도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는 점 등이 비슷했다. 그렇게 붙어있다 보면 사람에 대한 이해심과 포용력이 넓어지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나 자신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진다. 나를 있는 그대로 아껴주는 친구의 눈으로 나 스스로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경험은 결국 자기 이해와 수용으로 이어지고, 끈끈한 신뢰 기반의 공동체가 있으니 도전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든다. 설령 내가 실패하더라도, 이들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향후 그 사람이 삶의 여러 순간들을 대하는 태도에 분명 영향을 미칠 것이다.
IPC는 규칙은 있지만 규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 대한 페널티가 없다. 이 점이 갈등의 원인이면서도, 성장의 포인트가 된다. 예를 들어, 식사시간 뒤에는 매일 조별로 돌아가면서 설거지를 하는데,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안내는 계속 이루어지지만, 오지 않아도 벌점을 받거나, 혼이 난다거나 하는 페널티가 없다. 그러다보니 꼭 빠지는 친구들이 있고, 힘든 일을 피하고 싶어서 일부러 조금 늦게 와서 쉬운 일을 받는 친구들도 있다. 그런데 IPC에 한 학기 이상 먼저 머물고 있었던 한국인 분들에게 들은 바로는,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일을 빠지던 친구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고 한다. 랭귀지 코스가 아닌 본 학기에는 설거지뿐만 아니라 학교 청소도 매일매일 조를 나눠서 하는데, 그런 청소에 빠지던 친구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청소하러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순간들을 목격하면 엄청난 감동이 온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IPC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공동체 감각이 아닐까. 각자도생하며 영리하게 사는 것보다, 지금 당장은 조금 손해를 보는 것 같아보여도 결국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감각. 이곳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사랑의 위대함을 깨닫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