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덴마크의 건축과 도시재생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 코펜하겐의 행복 비결

by 파도

지난주 소개한 프리타운 크리스티아나에 이어서, 건축여행으로 돌아볼만한 곳들을 더 소개하려 한다. 이틀 정도를 쓰면 넉넉히 코펜하겐과 그 근교까지 돌아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하루만에 끝내야 해서 못가본 곳이 많아 정말 아쉬웠다. 나는 한국에서 '로컬' 관련 일을 하고 있기에 도시재생이 매우 익숙하기도 하고, 네덜란드에서부터 주거건축에 관심이 생겼던 터라, 이번 건축여행도 주로 주거건축이나 도시재생 사례를 위주로 보고 왔다.


대중교통 24시간권을 결제하고, IPC가 있는 헬싱외르에서 코펜하겐으로 가는 길에 먼저 Bellevue Beach에 들러 덴마크의 대표 건축가인 아르네 야콥슨의 작품을 보러 갔다. 벨레부에 해변은 코펜하겐에서 10km면 도착할 만큼 가까운 해변이라, 덴마크에서 휴가가 노동자의 법적 권리로 정식 인정되자 인기 관광지로 급부상했다고 한다. 이에 클램펜보르 지방정부는 이곳에 휴양단지를 만들고자 공모전을 진행했고, 여기에 야콥슨이 당선되어 해변의 디자인을 맡았다고 한다. 파란색 스트라이프 구조대 타워와 탈의실, 벨라비스타 주택 단지, 벨레부에 극장과 레스토랑 등, 벨레부에 해변에 관광객들이 와서 즐길 수 있는 모든 시설을 다 만든 것이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이 글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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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레부에 해변의 상징과도 같은 구조대 타워(좌)와 벨레부에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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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비스타 주택단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 가지였는데, 첫번째는 '여기가 관광지야?'라고 할 만큼 너무나 평화로운 일상적 장소였다는 것. 야콥슨의 건축물을 볼 수 있는 관광명소라고 해서 갔는데, 그 건축물들이 구조대 타워, 탈의실 등,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이었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건축물은 아무것도 아니란듯이 그냥 그 바다와 공원을 한가롭게 누리고 있었다. 심지어 나체 상태로 누워 햇살을 받거나 바다수영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아르네 야콥슨의 작품은 그저 그곳의 전체적인 디자인이 좀 더 통일성을 가지도록 하는 역할일 뿐. 주목을 받는 역할이 아니라, 해변에 오는 사람들이 조금 더 즐겁고 조금 더 편리하도록 하는 역할이라는 게 느껴졌다.


두번째는 벨라비스타 주택단지였는데, U자형 건물인데 측면부는 일자형이 아니라 계단처럼 쌓여있는 모양이다. 알고보니 이곳은 모든 아파트에서 바다 조망이 가능하도록 창문과 발코니가 배치되었다고 한다. 건물 자체는 눈을 사로잡는 엄청난 아름다움은 없는데, 이곳에 묵는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방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니. 그 자체가 커다란 메리트이자 배려로 느껴졌다. 오션뷰는 보통 더 비싸기에, 돈을 아껴야 하는 사람들은 오션뷰를 포기하곤 하는데 이곳에선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물론 이 주택단지의 숙박가격이 다른 곳보다 비쌀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한 건물 안에서는 차별이 없지 않은가.)


시간만 충분했다면 나도 하루종일 이곳에 누워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해변 반대편에는 사슴이 있는 놀이공원도 있다고 하니, 거기도 즐기면서 말이다. 추측해보건대, 놀이공원도 클램펜보르 지방정부가 이곳에 관광객을 더 불러모으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게 아니었을까? 그들의 계획은 무엇이었을지, 달성이 됐을지 상상해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었다.


20250809_125745.jpg 탈의실이었던 곳. 지금은 닫혀있는 곳도 있고, 요가수업을 하는 곳도 있었다. 임대 방식으로 전환된 것으로 추정. 탈의실 위의 녹지에서도 산책이나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20250809_125749.jpg 해변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담하고 평화로운 곳.


그 다음에는 코펜하겐의 재개발 지구들을 둘러봤다. 시간과 핸드폰 배터리의 제한으로 동선상 가장 괜찮은 곳들, 그리고 정말정말 가고싶은 곳들만 추려서 다녀왔는데, 다음에는 더 제대로 공부하고 많은 걸 보고 오고 싶다. 덴마크의 건축은 'COBE'와 'BIG'라는 두 건축사무소를 빼고 논할 수 없는데, 나도 이 두 사무소의 건축물들을 주로 보고 왔다.


건축물을 하나하나 소개하기에 앞서, 두 건축사무소에 대해 먼저 설명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COBE와 BIG은 둘 다 '보다 살기좋은 도시'를 만든다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풀어내는 방식이 대조적이다. COBE는 주민들의 일상적 공간을 보다 낫게 설계하면서 일상의 질을 높이는 조용한 방식으로, BIG은 도시의 문제를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해결하는 랜드마크를 만드는 방식으로 그 목표를 달성한다.


COBE는 자신들의 신념을 이렇게 소개한다.

Architecture is built for people,
shaped by context,
and designed to stand the test of time.


"Life between buildings". COBE는 건축을 '조형물'보다 '사람이 머무는 배경'으로 보기에, 건물 자체보다 그 앞의 광장, 수변 데크, 사람들이 앉아 쉬는 공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또한 '맥락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주변의 역사나 재료, 시선, 사람들에게 그 공간이 원래 어떤 곳이었는지 등을 분석하고 '원래 거기 있었던 것 같은 건물'을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 COBE의 건축물들은 '우와!'라는 감탄사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데, 5분만 멈춰서 그곳을 누리는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와, 나도 여기 살고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크리스티아나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우연히 'Krøyers Plads'를 마주했는데, '오, 여기 뭔가 심상치 않은데?'라는 생각이 들어 찾아봤더니 아니나다를까 COBE의 도시재생 사례였다. Krøyers Plads는 주상복합 단지인데, 원래는 항구 창고였던 곳이라고 한다. 재개발을 두고 수 년간 행정과 주민 사이에 치열한 갈등공방이 있었는데, COBE와 Vilhelm Lauritzen Architects가 시공사로 선정되면서 주민들의 의견을 많이 반영해 '주민 참여 설계'의 성공사례로도 평가받는다고 한다. 게다가 고효율 단열재, 빗물 재활용, 저에너지 조명 시스템 등을 적용해 단열·환기·에너지 효율이 법적 기준보다 40% 이상 높게 만들어, Nordic Swan Ecolabel의 인증을 획득한 최초의 주택 건축 프로젝트기도 하다. COBE 홈페이지에 이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가 잘 되어있으니 한번 읽어보는 것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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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곳에 사는 거주민들,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모두 편안한 경험을 제공한다.


COBE는 이곳을 설계할 때 원래 옛 항구창고였다는 역사적 맥락을 중요하게 고려하며 디자인했다. 이 동네는 17세기 초, 코펜하겐 항구를 확장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된 수변지구였다고 한다. 원래는 상인·선원·노동자들이 사는 산업·주거 혼합 지역이었는데, 20세기 들어 항구 기능이 축소되면서 창고와 공장이 방치되었고, 2016년에 재개발이 된 것이다. COBE는 덴마크 옛 항구 창고 특유의 '뾰족한 박공지붕'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주변 건물의 높이·폭·지붕 각도를 분석해 비례를 맞추어 새 건물인데도 오래된 동네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했다. 또한, 1층의 수변 데크는 완전히 개방해 주민이든 관광객이든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보행자·자전거의 동선을 물 바로 옆에 두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로 즐길 수 있고, 실제로 여름에는 수영하거나 카약 타는 사람들이 흔하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다녀온 날도 사람들이 이 근처 광장에 앉아 식사를 하며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또한 Nordhavn 지역의 도시재생·수변 개발 프로젝트도 COBE가 많이 진행하고 있는데, 사무실도 여기에 두었고, The Silo라는 커다란 빌딩에서부터 Orientkaj & Nordhavn 기차/지하철역까지, 굉장히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했다. 이곳은 2070년까지 4만명이 거주하고 4만명이 근무하는 지속가능 도시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너무 적은 목표인구에 놀라지 마시길. 덴마크 인구는 우리나라의 1/8 수준인 600만명이다.) 코펜하겐이 추구하는 '세계에서 가장 지속가능한 도시'라는 비전에 핵심 역할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은 15분 도시 컨셉으로, 집에서 도보·자전거로 15분 안에 모든 생활·업무·여가활동이 가능하도록 주거·사무·상업·문화 시설을 혼합 배치하고, 건물 난방·냉방에 지열·해수열 사용, 옥상 녹화, 빗물 재활용, 태양광 패널 사용 등을 통해 환경적으로도 지속가능한 도시로 만든다고 한다. 생산전력이 사용전력보다 많은 '에너지 플러스' 건물 실험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The Silo는 1960년대 곡물 저장소였던 곳을 주거·전시 공간으로 리노베이션한 건물이다. 덴마크에서 드물게 고층 건물인데, 꼭대기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항구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이 건물은 원래 노르드하운 지역의 가장 상징적인 구조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COBE는 기존의 콘크리트 구조는 그대로 유지한 채, 조립식 외벽을 덮어씌워 이산화탄소 발생을 최소화하면서 단열효과는 더 높였다고 한다. 최상층만 레스토랑이고 나머지는 아파트인데, 찾아보니 내부 구조도 인상적이었다. 여기에서 내부 사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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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축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바로 'Kronløbsøen'이다. 노르드하운 지역에 있는 인공섬이자 수변 주거단지인데, Krøyers Plads와 마찬가지로 COBE와 Vilhelm Lauritzen Architects의 작품이다. 크론뢰브쇠엔은 물을 생활 공간의 일부로 들여와서, 난간을 최소화하고, 계단이나 데크를 앉아서 물가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물론, 물에 바로 뛰어드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돈을 아끼려고 마트에서 싼 곡물빵(루그브뢰드) 하나를 사서 여기 앉아 먹으며 사람들을 구경했는데, 이 건물에 사는 사람들도, 살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이 수변 공간을 즐기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물에 풍덩 뛰어들어 자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들에게 이곳은 완벽하게 행복한 곳이 아닐까? 거기서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이는 단순히 건물 하나를 멋지게 짓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다. 도시의 인프라 차원에서 이러한 '수영하는 삶'이 허용된 것이다. 특히 노르드하운 전반에 쓰인 밝은 톤의 벽돌은 산업항구의 거친 콘크리트의 느낌과 덴마크 전통 재료의 결합을 통해 과시적이지 않은 느낌을 내고, '부유층 전용 수변이 아닌, 도시 전체를 위한 수변'이라는 메시지를 준다고 한다. 보다 많은 사진과 설명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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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든 물에 풍덩 뛰어드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BIG과 나머지 건축물들은 다음 글에서 이어서 다루도록 하겠다. 그곳에 살고, 그 공간을 누리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도시재생과 주거건축. 우리나라 도시재생은 멋진 랜드마크나 '일단 짓고 보는' 하드웨어 중심이 많고, 재개발의 주요 목적도 '삶의 질'보다는 '재산 증식'이 중요한데 반해, 이곳에서는 사람이 중심이 되고, 시간의 힘을 믿는 도시재생이 가능하다는 것이 참 부럽고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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