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이 올라갈수록 작은 스케일(scale)에서 큰 스케일의 건물을 디자인했다. 전공에서 전반적으로 배운 것은 사이트 분석, 콘셉트 잡기, 공간 구획하기, 입면/단면/평면 등의 도면 그리는 방법, 모형 만드는 법, 디자인 솔루션 등 이다.
나는 2학년 때의 주택 프로젝트가 가장 재미있었다.
주택의 사이트(대지)는 내가 정할 수 있는데 나는 특이하게도 내 고등학교 친구가 살던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의 언덕길에 위치한 주택으로 정했다. 이유는 실제 실측을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고, 예전 우리 할아버지 집과 느낌이 비슷했었기 때문이다. 직접 가서 동네를 둘러보고, 대지 사진을 찍어서 도면으로 만들었다. 기존에 있던 주택은 없는 것으로 하고 새롭게 내가 건축주가 되어 내부를 상상하면서 외관을 만들고 전체 공간을 구획하고 배치했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을 생각하면서 마당과 맞닿은 1층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공간, 2층에 부모님의 공간, 3층은 동생과 나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공간이 층으로 분리되어 사생활은 지키지만 서로 소통을 할 수 있게끔 천고를 열어주었다. 1층에 휴식공간과 마당을 만들고, 2/3층에는 외부 테라스 공간을 만들었다. 효율적인 배치와 동선을 고민했고 주방 공간, 거실에 소파 배치에도 고심을 했다. 다 만들고 나니 미래에 가족들과 실제 살고 싶은 공간이 되었다.
(#화질은 좋지 않지만, 당시에 만들었던 3D와 실제 주택모형.)
우리 집을 내 손으로 만들면서 건축이 처음으로 재밌다고 생각했다. 주택 프로젝트는 A+를 받았고 이후 연이 되어 당시 나를 지도해 주셨던 교수님의 건축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취업 전에 잠깐 일하기도 했다.
그 뒤로도 나는 학교에서 다양한 스케일의 건축물들을 설계했지만 큰 스케일의 건물들과 공부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깊고 심오한 건축의 세계가 나에게는 좀 버거웠고 흥미롭지 못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생각이 굳어지게 되었다.
"나는 작은 스케일의 공간을 컨셉추얼 하게 다뤄야겠어. 리빙 VMD나 인테리어를 해야겠다."
결심을 한 뒤로 4학년부터 리빙 VMD를 위해 일러스트레이터도 배우고 민간 자격증도 따고 홍대에 학원도 등록해서 VMD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그리고 졸업 전에 모든 전시/유통 회사에 지원했다.
애석하게도 한 군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포트폴리오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관련 이력이 없어서 일까? 신입 VMD로의 취업이 쉽지 않았다.
(*선택받지 못한 나의 VMD 포폴 일부. 스타의 호텔방을 컨셉으로 잡아 꾸민 콜라주.)
결국 VMD를 포기하고 인테리어나 가구 회사의 디자이너로 취업을 하기 위해 눈을 돌렸다. 당시만 해도 주변에서 인테리어 회사는 을 중의 을이고 일이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고민이 되었고, 나는 열정페이로 돈을 적게 받으며 일하고 싶지 않았다. (돈을 빨리 벌어서 집에서 독립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러다가 한 대형가구회사에서 '공간 코디네이터'라는 직종을 뽑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객에게 공간 상담을 해주고 가구를 제안하는 일이라고 쓰여있었고 디자인상담을 하는 것은 내가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게다가 인센티브 제도로 연봉과 처우가 나쁘지 않았다.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닌 상담을 통해 실적을 내야 하는 영업직이라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고객을 만나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디자이너로 첫 취업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고심을 하다 지원을 하고 서류에 붙었다.인생 처음 첫 면접을 덜덜 떨면서 보았다. 말을 잘하는 다른 지원자 친구들에 비해 준비가 부족했던 나는 면접을 망쳤다고 느꼈다.
어짜피 안될 줄 알았고 다시 디자이너 취업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르바이트를 하는 도중에 최종 합격 전화를 받았다.
"XX 씨 맞으시죠? 최종합격하셔서 전화드렸습니다."
"정말요? 너무 감사합니다!"
기대하지 않았어서 더욱 놀랐고 나는 인사 담당자에게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아직도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