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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많은디자이너 Aug 04. 2024

내가 건축학과에 가게 된 이유

어린 시절 나의 집에 대한 추억과 트라우마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서울시 서대문구 소재에 있는 밀집 주택가였다.

펜으로 구불구불 그린 같은 길을 따라서 붉은 벽돌과 붉은 기와가 있는 옛날 집들이 1m도 안 되는 간격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필지는 반듯하지 않고 길이 난대로 집들을 지은 듯했고, 우리 집은 그중에서도 아래 경사가 가파른 곳에 있었다.

(*사진은 우리 동네는 아니지만 느낌이 비슷하다. 뉴스에서 가져온 서울의 한 다세대 주택가)


밑에서부터 올라가긴 조금 숨이 찼지만 집 자체는 좋았다. 당시 우리 집은 4층짜리 단독주택이었고 그곳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작은 아빠네 부부, 삼촌네 부부까지 온 식구가 같이 살았다. 4층 꼭대기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운영하는 옷공장이 었다. 우리 집은 하나의 작은 사회와 같았고 집 전체가 내 놀이터였다.




 유치원 시절의 나는 종종 4층 할아버지 공장에서 원단 위에 초크로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미싱 돌아가는 소리와 공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의 관심이 좋았다. 나는 말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활발한 아이었다. (공장 아주머니가 좋아 집으로 쫓아가서 아주머니가 나를 다시 데려다 준 일화는 우리 가족 사이에서 유명하다.) 3층에는 작은 아빠네가 았고 가면 맛있는 간식을 얻어 먹곤 했다. 4층부터 2층까지는 뒷 계단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2층은 큰 거실과 부엌이 있는 메인 공간이었고 우리가족과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았다. 원래는 대문을 통해 1층부터 올라가야 하지만 지름길로 2층 작은방의  큰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바로 진입하곤 했다.


2층 우리 집은 내부가 천장부터 벽, 바닥까지 나무로 된 당시 고급인테리어의 집이었고 집 전체에 나무 냄새가 폴폴 났다. 2층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마당이 있었는데 마당은 작았지만 철이 되면 꽃이 피고 나무에는 감과 대추가 열렸고, 나는 덜 익은 초록 대추를 따서 아삭아삭 씹어 먹곤 했다. (여담이지만 덜 익은 대추는 정말 맛있다.) 마당에는 집을 지키는 든든한 진돗개 친구도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1층 삼촌네가 살았고 커다란 대문이 있었다. 어린 시절 단독주택에서 살아본 경험이 참 행운이었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우리 집의 공간은 나를 창의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로 자라게 했다. 


 슬프게도 우리 집은 점점 가세가 기울었다. 어릴 땐 몰랐지만 할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섰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단독주택이었던 우리 집을 다세대 주택으로 재건축해 쪼개서 집을 팔기로 했다. 4층짜리 단독주택이 다세대 주택으로 바뀌는데 몇 달이 걸렸다.


 우리 집만의 독특함이 사라지고 일반적인 20평형, 30평형 아파트를 표방한 구조가 되는 것이 나는 너무나 슬펐다. 당시 엄마는 할머니에게 으레 주인집들이 하는 것처럼 4층 공간 전체를 넓게 터서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었지만(그랬다면 넓은 집에서 살았을텐데...) 할머니가 집이 안 팔릴 수 있으니 우리가 2층 제일 낮은 층으로 가자고 했다고 한다.


얼마 뒤 할아버지네는 201호, 우리 집은 202호에 나란히 입주했다. 집 안은 깔끔했으나 2층이라 주변 건물에 막혀 빛이 잘 들지 않았다. 2층 밑은 필로티 구조로 바로 주차장이라 겨울엔 너무 추웠다. 그래도 좋았던 점은 동생과 나뉘어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겼다. 디자인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초등학교 이후 엄마가 새로 사준 H형 책상과 화장대와 침대로 꾸며진 내 방이 참 아늑했고 좋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겨울방학에 최악의 일이 생겼다. 당시 엄마는 없는 돈을 끌어다 다른 곳에 아파트를 투자해 둔 것이 있었다. 1 가구 2 주택 세금이 세다는 것이 무서워서, 그리고 엄마아빠의 새로운 가게를 위한 창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었나 보다.


어느 날 부모님이 202호 우리 집을 팔더니 201호 할아버지네와 합가를 하게 되었고, 방 3개짜리 30평형도 안되는 집에 6명이 붙어 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내 방은 동생과 합쳐졌고 우리는 세 개의 방 중에서 가장 작은 방으로 배치되었다. 가로 세로 3m가 안되는 작은 방에 슈퍼싱글 침대 1개, 책상 1개, 옷장 1개를 넣으니 공간이 꽉 찼다. 방은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2학년 여자애 둘이 쓰기엔 너무 좁았다. 가뜩에 나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비좁은 슈퍼싱글 침대에서 동생과 어깨를 부딪치고 잤고 우리는 감정 다툼이 많아졌다.


옷장은 수납물이 부족해 터져 나가서 늘 열려 있었고 잘 때도 내 눈을 어지렵혔다. 나는 어지럽고 정돈되지 않은 환경에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나 배치와 정리 등 공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옷과 수납물을 효과적으로 정리하는 법을 몰랐고 가구를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방법도 몰랐다. 우리 부모님은 성실하셨지만 공간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고 늘 늦게까지 일하시고 저녁에만 들어왔다. 그저 우리를 키워내기 위한 돈을 버느라 내 작은 공간까지 케어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 속에서 예민하고 화가 많았다. 어지럽고 좁은 공간 속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았고 속에서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특히나 친구들 집에 놀러 갔다 오면 화가 많이 났다. 개인 방에 핑크색 이불, 예쁜 침대와 책상을 가진 친구의 공간을 보고 돌아오면 '우리 집은 이러지? 나는 왜 이런 곳에서 살고 있지?' 하는 생각에 슬프고 자괴감까지 들었다. 나를 이런 공간에서 살게 하는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나는 커서 넓고 예쁜 집에서 살아야지. 철이 되면 쿠션 커버를 바뀌 끼고 예쁜 소품을 두고 정돈된 환경에서 살아야지.'


자기 전에 혼자 망상을 하면서 나만의 공간에 대한 갈망을 키워 나갔다.


 시간이 흘러 고3 이 되었고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가 되었다. 나는 자연스레 실내디자인/주거 쪽을 희망했지만 실내디자인은 입시미술을 해야 해서 패스하고 주거환경학과는 학과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 눈에 띈 게 건축학과였다. 건축학은 더 큰 학문이니까 전공하면 공간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나는 수능을 보고 점수에 맞춰 가나다군 모두 건축학과를 지원했고 대학의 건축학과에 합격했다.


합격한 날, 스스로 다짐했다.


"얼른 대학에 가서 좋은 공간이 뭔지 배워야겠다. 그리고 빨리 돈을 벌어서 그런 공간에서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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