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의 사전적 의미는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의미에 충실하게, 약간은 불성실하게 매일 기록을 남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유치원에서 그림 일기를 발표하던 기억이 있다. 스케치북의 한 페이지에 그림 그리는 칸과 글 쓰는 네모칸이 같이 있는 모양새 말고, 한 페이지는 그림만 다른 페이지에는 글만 쓸 수 있도록 한 일기장을 좋아했다. 쓰고 싶은 말이 많았기도 하고, 많이 써 가면 칭찬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다른 기억에는 우리 집에 놀러왔던 친구가 미워서, 친구가 돌아간 다음에 책상 밑에 들어가 노트 맨 뒷장에 ㅇㅇㅇ랑 ㅁㅁㅁ 미워! 라고 적었던 것이 있다. 차마 친구한테 대놓고 말은 못하겠고 분은 풀리지 않아서 예쁘게 적지도 않고 박박 적었던, 인생 최초의 유사 데스노트였을 것이다.
학교에 들어간 후 친한 친구들끼리는 작은 자물쇠가 달렸거나 비밀번호로 열어야 하는 교환일기를 쓰기도 했다. 우리 중에 한 명이라도 배신하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닌게 될 테고, 혹시라도 누군가 이 일기장을 탐낼 수도 있기에 속마음을 무장 해제할 수 있는 안전한 수단은 아니었다.
아마 그 시절의 교환일기는 일기라기보단 너와 내가 친하다는 증거이자 편지에 가까웠을 것이다.
더이상 학교 숙제로 일기장을 제출하지 않아도 되었을 즈음 나의 기록은 소홀해졌고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견뎌냈던 재수생 때 다시 시작됐다. 학원에서 나눠준 플래너 작은 칸에 오늘의 반성과 내일의 다짐을 적어가며 사건은 쓰지 않고 감정만 남겨뒀던 1년의 기록.
그렇게 한동안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장에서조차 솔직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지 못했다.
내가 사라졌을 때 누군가 이 기록을 보면 어떡하지? 내가 사라진 이유를 잘못 판단하면 어떡하지? 하는 이상한 걱정은 물론 나중에 내가 봤을 때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어서 슬프다, 힘들다, 재미있었다, 하는 감정만 남겨두고 사건은 휘발되어 버린 몇 년간의 기록을 뒤로 하고.
그러시면 안되는 거였어요, 하고 말하지 못했던 그 날의 모든 사건과 감정을 종이 위에 쏟아내 보았던 날.
꼭 상대방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한 것 같은 기분에 속이 풀렸던 그 시간 이후로.
조금은 더 과감하게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글은 나를 위로한다.
보이지 않는 일기와 보이는 일기를 번갈아 쓰며 남긴 기록은 기억이 된다. 그 기억은 또 자산이 된다.
자물쇠 없는 교환일기장에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누구나 볼 수 있는 일기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