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자연에서 울린 메세지

by Davca


이번 주말, 이전에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들어본 적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청옥산 전망대'라는 곳에서 머리 위에 수많은 별들과, 일출을 지켜보았다. 서울 근교 수도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밝은 별들과, 바닷가 근처로 여행을 가야만 볼 수 있던 일출을 육백마지기에 올라 지켜보았더니 새로운 기분이었다.


새벽 4시 반에,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물로 덜 익은 컵라면을 흡입하듯 먹고, 차가운 공기에 몸을 떨면서 들이키는 라면 국물에 녹아들지 못해 콧 속으로 스며든 차가운 기운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핸드폰과 어플을 통해 떠오르는 태양을 놓치기 싫어 연신 촬영을 해댔고 배경화면으로 까지 설정해 두었다. 피곤하지만 좋았고 감사했다.


평창에 온 김에 아침은 강릉으로 이동해 그저 그러했던 초당 순두부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우리가 간 그 집은 별로였다. 다른 곳은 가보지 않았으니, 초당 순두부 자체를 별로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겠다) 안목 커피거리로 이동해 바다를 보고 커피를 한잔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바닷가에 놀러 온 딸내미와 아들은 파도에 발을 담갔다 도망가기를 반복하고, 파도에 사라지는 모래 형태를 만들고 지켜보고 다시 만들어보는 놀이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그저 아내와 같이 앉아서 지켜보니 그저 행복하고 감사했다. 이게 뭐라고 그간 이 짧은 시간도 내지 못했던 것일까. 그저 핑계만 대고 있었구나 싶었다.


오후에 속초 중앙시장으로 이동해서 그렇게 유명하다던 술빵과 만석 닭강정, 속초의 수제 맥주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딸내미는 그새 하나뿐인 이모를 졸라, 새빨간 빨대가 꼳혀 있는 긴 통에 든 슬러시를 하나 사들고 둘도 없는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맛이 궁금해 한입 달라는 아빠의 청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 그리도 좋았을까 이 아이는.




2016년 3월, 은행 퇴사를 2개월여 앞둔 시점에 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가족과의 시간, 시간이 흐른 뒤 딸아이가 기억할 나의 모습(당시엔 둘째가 없었기에, 내 고민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건 역시 첫째였다), 거대한 조직에서의 생활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1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나를 억누르고 지내온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과 억울함, 사람들 간의 관계의 균형을 유지함에서 오는 스트레스, 심하게 로드가 걸린 업무량, 직업적 비전과 나와 가족의 미래 등.



이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이상향과 현실과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인해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퇴사 1달 전 시점에서는 깊게 잠이 들지 못했고, 한 시간마다 깨서 울다 잠들고 다시 또 깨서 우는 정신적 이상행태까지 보였다. 나 스스로가 걱정되었고, 아내에게도 미안했다. 결과적으로 오랜 고민 끝에, 9년을 참아냈던 첫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지금도 난 여전히 '직장'에 속해있다. 누가 그랬던가.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라고.


물론 지금의 조직은 내가 재직했던 당시의 은행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긴 하다. 또 다른 고민과 걱정이 있기도 하나, 보수적이며 폐쇄적이었던 곳에서 쌓였던 스트레스 보다, 건설적인 고민을 하게 됨은 너무나도 다행스럽다. 그래도 조직은 조직이다. (조직에서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생각하는 대로의 삶을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는 곧 글을 올려볼 예정이다.)



현실과의 적절한 타협 지점 그 중간 어디쯤에 우리는 '하루'라는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놓아둔다. 먹고사는 게 바쁘고, 주택담보대출을 갚기 위해선 돈벌이를 해야 하는 가장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말하고(전혀 틀린 얘기도 아니긴 하다), 세상 살면서 어떻게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겠냐는 씁쓸한 자기 위안을 삼으며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주말이 가까워 오면, 이번 주말엔 뭐 할 거냐는 아내의 질문이 부담스러웠다. 조직과 사회생활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나의 시간은 '휴식'을 원했다. 사실 휴식이라기보다 스스로를 '방임'에 가깝게 내버려 두는 시간을 원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명력 없는 시간들 탓에 외부활동은 부담스러웠다.



5년 전 첫 직장을 떠날 때 했던 나의 고민과 다짐에 부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성향상 없는 일도 만들어하고, 일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의 패턴은 단 1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나로 살고 건강한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러닝머신처럼 Cool Down의 시간이 필요하다. 24시간 중에 우리는 보통 8시간의 수면을 하고, 8시간의 일(냉정하게 못해도 10시간은 일을 하는 것 같다), 8시간의 식사, 휴식 등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다. 역시 하루 중 가장 많은 비중은 '일'에 쏠려있다. 그러다 보니, 직업적인 부분에 대한 부정적인 상황과 스트레스는 개인적인 시간과 수면에 강항 영향을 준다. 이는 가족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일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 지수가 높을수록 가족과의 시간과 활동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주말에 놀러 가자는 아내의 얘기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휴식이라 볼 수 없는 '무기력의 시간'을 보내면서, '쉬고 싶다'로 적절히 포장한다.



바쁘게 일하고, 업무의 강도가 강할수록 주말은 '제대로' 가족과 힐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새벽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일출을 보지 않더라도 가족과의 교감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행복과 아내의 행복, 그리고 아이들의 행복은 긴밀하고도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행을 간다고 가족의 구성원들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고 예단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러한 경험으로 남게 되는 좋았던 순간에 대한 기억의 누적은, 안정적인 가족의 모습과 의미 있는 행복에 대한 자기만의 정의를 내려줄 확률이 높아진다.



지금에 비해 젊었던 그때를 떠올려보면, 몸은 고단하고 힘든 여행을 했더라도 다녀오면 그때가 기억에 남고 다시 또 가고 싶기까지 하다. 그 이유는, 그 시간이 주는 새로운 경험이라는 가치와 의미가 우리의 삶에서 압도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쁘게 사느라 가족을 돌보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젊었을 때 아이들과 더 많이 다녀볼걸 그랬다는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가장들의 짠내 나고 씁쓸한 독백이다. 블로그에 자주 써왔지만,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끝이 있으나 그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미루지 말자. 휴식을 원하는 나의 시간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결코 '희생'이 아니며, 가족을 위해 일하느라 여유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은 대게 일반적인 경우에 '자기 합리화'이다. 아내와 딸과 아이의 이야기는 들어줄 시간이 없으면서, 직장에서 알게 된 인연들과의 술자리는 꽤나 빈번하다. 등산을 빙자한 주말 회식까지.



누가 당신의 시간을 담보로 원치도 않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가. 그저 당신의 선택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어쩔 수 없이 '희생'한다고 하며, 정작 각자의 희생을 강요당하는 건, 우리의 가족들이 아닐까. 지치고 힘들고 나의 삶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질수록 '가족'과 함께하자. 근사한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잠을 자야 여행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하다 못해 집 앞마당에 텐트를 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려는 노력 조차 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팀원들의 생일은 챙기면서, 장인 장모의 생신엔 무감각하고 무신경했을 수 있다.


결혼하고 이렇다 할 추억 없이 7년의 시간이 흘러버린 기분이다.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가 가족이다'라는 표현을 쉽게 하지만, 그만큼 쉽게 잊고 살아온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건 시간만이 아니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삶도, 나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유한하고 그것은 상대적이기에 내가 미뤄 온 그 시간에서 어느 순간, 그들은 없고 아쉬움과 후회만으로 채워진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치열하게 살아온 당신은

오늘, 우리의 가족과,

어떠한 시간들로 채워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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