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해 가장 모른다

인생의 시계 어딘가에 있는 우리에게 필연은 끝이 있다는 것이다.

by Davca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삶의 기술이 아닌, 나의 생각과 바람이 어느 곳을 향해있는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만큼 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추상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고, 그러다 보니 관대해진다. 나의 노력은 수준과 강도는 상대를 평가하는 기준에 비해 현저히 낮고 이는 스스로의 어떤 식으로의 발전이든 도움을 주기보다 더디게 만드는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돌아본 주위의 나를 제외한 많은 이들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내면이 아닌 처한 환경들을 핑계 삼기 시작한다.


이것이 과연 나만의 과오이고 실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느 순간이든 이 세상에서 나만의 게임을 펼치기 위하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돌아보며 오직 내가 중심이 되는 세상을 설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나마 도덕과 윤리 시간에 배운 것은 나보다는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의 개인의 역할과 기준 그리고 응당 그래야 하는 이해와 배려에 대해 배웠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분명 아닌데, 타인을 이해하기 전에 자신에 대한 관찰이 선행되었어야 했다. 나를 알수록, 나의 이해되지 않는 내면의 메커니즘에 대해 알게 될수록 타인과의 관계에서 여유가 생긴다. 성급한 판단대신 나와 다르지 않은 자기 본위의 삶의 방식에 대해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 역시 그럴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틀림이 아닌 다름을 깨닫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이 지점부터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중요함을 알게 된다. 비교의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고 나는 오직 ‘나‘ 로써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에 대해 가장 모른다.


그렇기에 틱낫한 스님의 말씀처럼 미지의 두려움 대신 익숙한 괴로움을 택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그것은 괴로움이 아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보이기’ 때문에. 한참을 그렇게 살아가다 돌아본 나의 오늘은,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다. 나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이 나를 짓누르기도 하고 지금까지의 시간이 억울해지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렇게라도 깨달음이 찾아왔다는 사실이고, 그때가 언제든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그런 내면의 목소리가 들림에도 어쩔 수 없다는 변명으로 내가 아닌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무책임하게 현실을 내려놓게 되면 가장으로서 부모로서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나를 갉아먹는 괴로움은 ‘다들 그렇게 산다’는 스스로 검증하지 않았던 변명뒤에 따르는 당연함으로 자신을 압도한다.


이런 과정을 숱하게 보낸 지금 나는, 왜 나 자신을 희생하여 누군가를 지켜내려 하는 것인가. 정말이지 방법은 찾아본 것인가. 한 번이라도 가장 소중한 나 자신에게 진심을 다한 질문을 던져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나에 대해 가장 모르는 나의 삶이 다하는 그 순간, 주어지는 대로 살아왔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 생에서의 모습이었다고 흡족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인생은 없다. 자신보다 소중한 대상은 없다. 부모는, 가장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해야 하는 최선을 다한 것으로 된 것이다. 자녀는, 아내는, 남편은 각자의 삶이 있다. 지금의 나이와 건강을 생각해 보자. 깨어있는 가장 젊은 순간의 지금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되는가. 한 겨울 계곡물의 얼음을 깨고 들어앉아야 정신이 드는 것이라면 그렇게라도 해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내가 지불하는 시간과 비용과 에너지와 건강이, 이 순간 누구를 향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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