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는다
하루 1,440분의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던 적이 있었는가?
늘 무언가에 쫓기는 시간이 태반이었다. 여유롭게 업무를 마치고 평온한 쉼이 잦아드는 일상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는지, 정말 그런 때가 있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이제와 좀 아쉽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거워진 머리 탓에 행동하지 못하고 방안에만 갇혀, 아니 나의 편협하고 부정적인 두려움에 갇혀 이도저도 하지 않았던 시간의 누적이다. 내게 오지 않은 가까운 미래에 대한 혹은 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압도당하면서도 난 그 원인을 찾아내거나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근원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시간을 회피하기 위한 산택 혹은 운동 정도가 내가 했던 전부였다. 심지어 그런 괴로움이 엄습해올 땐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상태였다. 마음은 번잡했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불안정한 마음은 나의 몸을 통제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이끌기도 했다. 폭음과 폭식. 심지어 이는 그 순간의 고민조차 덜어내는 데에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
10대에서 30대를 지나 40대 중간에 다다른 지금, 각 시절마다 나의 마음이 정박해 있던 곳은 매번 달랐다. 10대에는 이성에 대한 관심에, 20대에는 학업으로 인한 인정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에, 30대에는 직장에서의 인정과 경제적인 여유, 40대에는 자립과 사회적 기여 그리고 성공에. 그때의 어려운 마음들은 주된 목표에서 멀어지거나 성과가 보이지 않음에 흔들렸다. 나의 길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였다. 그러다 우연히 좋은 성과를 얻게 될 때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상의 기준이 높아질수록 만족의 크기는 줄어들었고 내면의 자책에 대한 소리는 커져만 갔다. 외적으로 안정감을 찾고 잘되어 갈수록 마음은 빈곤해졌으며 위축되어 갔다. 적정한 수준 없이 끝없는 성장을 설계했다. 잘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의기소침하냐, 는 얘기도 듣기 시작했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꿈꿔야 하는데, 실체 없는 걱정과 두려움에 갇혀 건강하지 못한 생각의 근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십수 년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들 중 30% 정도는 마음을 다스리고 스스로 이끌어가는 능력을 얻어낼 수 있는 방향을 알려주는 내용들이었다. 여전히 이런 분야의 신간을 만나면 내용과 서평을 꼼꼼히 읽어보고 구매하며 가급적 구입한 당일 혹은 다음 날까지 빠르게 정독한다. 재독과 삼독을 반복하는 책들도 내 부분 해당 분야의 책이다. 그 정도로 삶의 기본은 나의 마음, 나의 몸 그리고 자신의 근원적 실체에 대한 이해라고 믿고 있다. 이를 완벽하게 깨닫고 이해한 이들의 사는 세상은, 대다수의 인생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것이고 상실과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도 나를 버리거나 잃지 않는다. 마음의 폭풍우 속에서도 스스로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고귀한 지혜를 얻은 삶을 살아간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난 삶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수용과 창조적인 태도로 다가오는 시간들을 제한 없이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의 뿌리는 나의 마음에 존재한다. 막연한 상상이 만들어내는 불충분한 형상을 불완전한 마음이 주조해 내는 관습적 행동을 끊어내어야 새로운 의식으로의 연결이 가능해진다. 쉽게 감정에 동요되거나 치우치지 않도록 마음의 자리는 순백의 도화지 안에 존재해야 한다. 그 어떤 선도 그어져있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단편적인 사고의 방향으로 흐르는 인생을 관조하기에 우리의 하루에는 바로 그 순간들을 온전히 누리고 즐기기에 충분한 일들이 무수히 많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걱정을 애써 간직하거나 완벽한 준비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 애쓰지 말자. 1시간 뒤 우리의 모습은 그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수 있고 그것이 옳은지 그릇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치우친 생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인위적 긍정, 단편적 부정 모두 확대해석하거나 일반화하지 않는 평정이 마음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