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연성 없이 양념치킨이 먹고 싶었다.
아이들 때문에 순살치킨만 시켜 먹었는데, 있는 그대로의 '뼈 있는 치킨'이 먹고 싶었다. 다양한 시즈닝으로 뒤덮인 그런 치킨이 아닌 그냥 순수한 양념치킨 말이다.
둘째를 수영 보내고 40분간 양재천을 달렸다.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그간 달리지 못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씻어내고 집으로 돌아와 개운하게 샤워를 한 뒤 샐러드 가득한 포케를 한입 먹었다. 오래간만에 먹는 샐러드가 나쁘지 않았다. 더군다나 땀범벅이 될 정도로 달리고 난 후에 샐러드라니, 매우 모범적이지 않은가. 이렇게 스스로를 칭찬하다 며칠 전 그렇게도 먹고 싶던 양념치킨이 생각났다. 그것도 샐러드를 한가득 먹고 난 이후에.
오늘 하루 1/3 정도의 가격으로 치킨을 할인하는 행사 중이라는 아내의 한 마디는 나의 깊은 탄식으로 이어졌다. 재활용쓰레기와 음쓰를 버리며 생각해 보겠다며 일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렇다고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샐러드가 점령해 버린 위장을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난 언제고 치킨을 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윙이든 봉이든 (특이하게 다리를 선호하지 않는 나로선 아내와 싸울 일이 없다. 다리는 무조건 아내에게로) 가슴살도 나에겐 어느 때고 열려있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즐거움이 버겁게 느껴지다니, 온전히 나이 탓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정에 마음이 아려왔다. 아, 이렇게 세월이 흘러간단 말인가.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과는 다르게 몸이 받쳐주지 못해 소식을 해야 한단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저 눈앞에 아른거리는 양념치킨이 먹고 싶었을 뿐인데, 난 위장장애를 비롯한 식탐, 그렇게 먹는다 해도 남는 치킨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이것저것 고민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치킨은 먹지 못했고, 이럴 거면 샐러드를 먹지 말걸 하는 후회가 물밀듯 차올랐다.
바보 같기도 하면서 우스운 이 상황은 언젠가 양념치킨을 먹어야 일단락될 텐데 그날이 언제가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2만 원이 훌쩍 넘어버린 양념치킨은 이제 고민의 대상이 된 셈이다. 그래도 눅진한 양념 속에 감춰진 바삭한 치킨껍질과 부드러운 속살의 밀도는 나의 상상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세월의 흐름에 겸손해지고, 무리하지 않으며, 작은 소망을 품고 살고, 건강과 비용 그리고 잉여가 예상되는 무언가를 무리해서 손에 넣지는 말아야겠다는 교훈이 남았다.
고작 양념치킨이 먹고 싶었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