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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발견

by Johnstory

새벽 네시, 거실의 의미는 명상과 기록이다.



한동안 서재이자 글을 쓰는 공간으로 활용하던 방을 아들에게 내어주었다.


내년이면 초3이 되는 아들이 부쩍 방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남에, 그리고 매일 엄마가 공부 지도를 해주는 패턴에서 벗어나 누나처럼 알아서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보기 위함이었다. 대승적 차원에서 옳은 선택이고 당연한 결정이었으나 결과적으론 나의 작업공간을 내어준 셈이다. 사실 애초에 '나만의 공간'을 염두에 둔 적은 없었다. 첫째와 둘째의 방 하나씩만을 고려했을 뿐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공간을 별도로 만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팬트리나 안방 구석 코너쯤에 작은 책상 하나만 둬 볼까도 잠깐 생각했었으나 짐만 많아지고 공간을 더 복잡하게 사용하는 결과가 될 것 같아 생각으로만 그쳤었다.


그러나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올 당시 둘째는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고, 여전히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던 탓에 내가 쓰던 책상과 책장을 그대로 둘째가 쓸 방에 넣고 내가 활용한 것이다. 새벽에 조용히 책상에 앉아 명상을 하고 일기를 쓰고 하루를 계획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그랬던 공간을 이제 아들이 주로 쓰는 중이다. 혼자 학습지를 풀고 책을 읽고 학교 과제를 한다. 레고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각종 창작물(대게는 종이를 오리고 붙이고 상자를 이어가는 그런..)을 만든다. 제법 자신의 공간을 잘 활용하고 있다.




아직 내가 보던 책들은 다른 곳으로 옮길 대안이 마땅찮아 아들 방에 있지만 책상은 비워줘야 했기 때문에 노트북과 매일 쓰는 노트들은 거실로 가져 나왔다. 있는 물건을 활용하자는 취지로 이사오기 전 두 아이들의 학습용 그리고 식사 시에 활용했던 낮은 테이블과 의자를 쓰기로 했다. 올바른 자세와 장시간 작업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의 대안이다. 뭐 정 안되면 거실 테이블도 있으니.


그런데 신기한 일들이 생기는 중이다. '나만의 공간'이 주는 의미도 컸으나 이제 그런 공간이 사라진 후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의 범위가 더 넓어진 것이다. 거실에서 자고 일어나서 곧바로 명상을 한다. 거실 테이블에서 무드등 하나만 제일 약하게 켜두고 모닝페이지를 쓴다. 다시 거실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달리러 나간다.

돌아와서 냉수 샤워를 하고 다시 거실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방 안에서 창문을 열고 맞던 바람과 거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기분은 사뭇 다르다. 나만의 공간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들을 별다른 불평 없이 여기저기서 할 수 있게 되었다. 소유에 대한 마음을 비우니 집착이 사라지고 편안함이 남았다.



공간을 채우기보다 비워내는 것에 주목한다.


공간을 비워내다 보니 공간이 제대로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채워진 물건이 많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어느 순간부터 꽉 채워진 공간들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 그리고 가끔 한 장면을 떠올린다.


스티브잡스_명상.jpeg


이런 모습이다.


정말 필요한 것들만 남은 공간이다. 정리라는 것이 필요가 없을 정도의 물건만을 갖고 있다. 비단 스티브 잡스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생활을 하고 있는 미니멀리스트 분들을 최근에 본 적이 있다. 흡사 요가원 같은 분위기의 공간에서 살고 있는 분들이다. 나에게 제일 필요한 것들만 남아있게 되면 그것들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 반대로 필요가 아닌 욕망에 의해 소유하게 된 물건들은 볼 때마다 불편해진다. 사용빈도 또한 낮다. 그저 공간을 '채우고'만 있는 것들이다.



언젠가 떠날 때를 위해, 남아있을 가족들을 위해,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을 미리 정리한다는 분이 있었다. 휴대전화에 있는 사진도 모두 정리하고, 사진조차 잘 찍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세상과 이별한다고 해도 남아있는 이들이 번거롭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이가 사는 공간이, 진정 공간다운 공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두툼한 방석, 책 한두 권, 연필과 노트, 작은 침대와 침구류 두어 개, 매번 입는 같은 옷 두어 벌쯤. 공간에 압도되는 삶이 아닌, 공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한 개인의 참된 공간이다. 늘 마음의 평안과 여유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공간에 짓눌리는 것이 아닌 공간 안에서 나를 쉬게 하고 살게 하는 그런 장소이다.



나는 지금, 어떤 공간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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