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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의 발견

by Johnstory

직무 인터뷰를 봤습니다.



한동안 잠잠하던 직무 제안이 반가웠고 나름의 준비를 해봤습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많이 건강하고 예상 질문에 대한 답도 적어가며 외우기도 하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이제는 긴장하지 말고 지난 시간들에 대한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오자는 다짐만 합니다. 이렇게 제안을 받고 자리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그저 감사한 기다림을 만끽합니다. 잠자리에 누워서는 이리저리 인터뷰의 상황과 질문도 시뮬레이션해봅니다. 대게 그러면 그런 상황들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던 경험이 있었기에 중요한 일을 앞두고선 매번 상상 속의 예행연습을 하게 됩니다. 간혹 그 흐름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내가 매듭짓지 못하고 더 깊은 곳으로 흘러가게 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상대가 가진 궁금증의 다음 그다음 단계를 예상하기란 실로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보통 그런 경우는 웃을 수 있는 마무리를 하려 애씁니다. 그렇다고 시답잖은 농담을 던질 수는 없기에 나를 낮추는 솔직함으로 대응했던 경험들도 떠오릅니다. 그렇게 깊은 밤 숙면을 취했습니다. 꿈을 꾸었으나 전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었나 봅니다. 덕분에 컨디션도 좋습니다.




한 기업의 대표를 만나 지난 나의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늘 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은 성과에 대한 주제입니다. 내가 이뤄낸 업무적 성과가 가장 컸던 경험에 대해 물어옵니다. 중간 관리자 혹은 상급 관리자로서 성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보다 임원 후보자로서 이런 질문들은 몇 배는 더 무겁습니다. 늘 고생한 것은 팀이고 그 팀에 속한 후배들인데 ‘내가 이런 것들을 만들어냈다’라고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떠 어떠한 방향을 제시했고 그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라고 표현하는데 그럴 때마다 인터뷰어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한 번은 이 답변에 대해 궁금했는지 추가 질문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후보자께서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셨다는 건가요.

-말씀드린 대로 저는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역할을 했고, 그 방향대로 촘촘한 계획을 세웠던 매니저들과 매뉴얼대로 업무를 수행한 팀원들 덕에 그런 성과를 함께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답변의 취지를 이해했다는 표정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단계까지 오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당신이 그것을 다 했는지, 어느 정도의 기여도가 있었는지만을 표면적으로 평가합니다. 사실 이것이 직무 인터뷰의 본모습입니다. 그리고 기업마다의 채용문화가 있기에 제각기 다르기도 합니다. 상호 간에 시간을 내어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기에 불필요한 시간을 쓸 수 없고 필요한 이야기만을 빠르게 하고 그 시간 내에 후보자는 자신을 어필해야 합니다. 여타 후보자 보다 내가 나은 점을 하나라도 더 알려줘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과를 잘 포장해 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 없는 겸손은 때론 모자람으로 비치고 연차와 성과의 갭이 크다고 느껴지는 경우 자신의 성과라고 언급한 부분들의 진위여부를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로 무를 자르듯 정확하게 표현해야 하는데 그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업무라는 것이 명확한 수치로 재단하듯 영역을 구분하여 나누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양한 팀이 협업하여 만들어가는 하나의 프로젝트의 경우 자신이 맡은 역할 이상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애초에 기술되지 않은 역할이었으나 중간에 일회성으로 생겨나기도 하고 또 기존에 나의 역할이었으나 다른 이의 역할로 변경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 진행단계를 수치화하여 나의 기여도가 얼마인지 계산하는 작업을 매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굵직한 업무를 중심으로 내가 ‘크게’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한’ 것이 무엇인지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본 업무 이외에 프로젝트에 내가 도움을 주었던 것은 무엇인지 구분하여 생각해 봅니다.



지난 날들 내가 성과라고 이야기했던 모든 것들이 과연 나만의 성과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니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리고 내가 성과라 말한 것에 투입된 이들의 이름과 얼굴도 떠오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고 과정에 충실하며 솔직해야 합니다. 설령 직무 인터뷰를 잘 통과했다 하더라도 합격을 위한 포장 혹은 떳떳하지 못했던 답변들로 어찌어찌 잘 넘어갔더라도 머지않아 드러나게 됩니다. 했던 일,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 도움을 주었던 일 등 스스로 냉정하게 구분하고 내가 잘할 수 있었고 그 일들을 통해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던 경험들을 위주로 이야기하면 됩니다. 자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여러 사람이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나 자신도 괴롭습니다. 내 능력이 닿지 못하는 곳에, 내가 노력해도 간극을 메우기 어려운 곳에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고문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시 강조하건대 솔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점을 드러내되 단점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그때의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상황이 허락지 않아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인력이 부족하여 목표달성에 실패했고 내가 맡은 부분은 완벽하게 실행했으나 협업하는 부서의 미흡한 점들로 프로젝트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공은 나의 열심과 노력 덕분이고 실패는 외부의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난 과정들을 복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한 업무에 대해서 완벽했다면 전체적인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내가 더 해볼 수 있었던 것은 없었는지도 돌이켜봅니다. 그걸 왜 내가 하냐고 묻는다면, 괜찮습니다. 필수적인 건 아니니까요. 다만 이 과정을 통해 나는 관찰자가 되어 좀 더 깊은 시야로 상황과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장기판을 내려다보는 플레이어로서 다양한 가능성들을 점쳐볼 수 있습니다. 비록 과거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장기판의 말이었을 때 결코 보이지 않았던 메시지들도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꽤 자주 플레이어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일의 착수 시점에서도, 진행 중인 와중에도, 프로젝트가 진척 없이 답보상태에 처해있을 때도 나는 플레이어로서 장기판 전체를 아울러볼 수 있습니다. 의외의 곳에서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고 역할과 관계없이 내가 해낼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행합니다. 이런 자신만의 방법은 스스로 찾아낸 문제해결의 방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접근했는지, 왜 그런 방법을 선택했는지, 무슨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지 가장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의 반복과 누적이 나의 힘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껏 해온 업무와 조금은 결이 다를지라도 이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해 낸 스스로의 노력은 인터뷰어로 하여금 긍정적인 기대를 걸게 합니다.




지난 시간 동안 나의 업무역량을 상향평준화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많은 분들이 떠오릅니다. 선배도 있고 후배도 있습니다. 고객을 통해 배우기도 했고, 가족이 전해준 이야기를 통해 용기를 내기도 했습니다. 드문 성공과 빈번한 실패 모두로부터 배웠습니다. 생각보다 나는 단단한 사람입니다. 굳이 성과를 포장하지 않아도 내가 걸어온 길은 빛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덕분으로, 많은 이들의 도움과 응원으로 잘 나아갈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해 이성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대해서는 벌어진 사건만이 남아있습니다. 그것들에 감정을 투영하면 핑계가 되고 도피가 됩니다. 사건은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끔은 아프기도 하고 나를 상처 내는 일이라고 해도 사건 위에 감정을 남겨두면 두고두고 나를 괴롭힙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 때 나는 가장 먼저 핑계를 찾을 것입니다.

부족한 나도 나고, 넘치는 나도 납니다. 그러나 핑계는 포장과 회피에 얼룩진 흔적만을 남기게 됩니다. 귀한 시간 귀한 인연들과 함께하며 소중한 나의 에너지를 쏟아내는 한 번 뿐인 인생인데 나로 살아야 함이 마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의 인터뷰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온 만큼, 아니 그 이상 나로서 살아가야 할 떳떳한 나 자신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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