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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함의 발견

얼마나 취해야 충분한 것인가

by Johnstory

하나면 족하다는 것을 잊고 지냈습니다.



식사도 밥 한 공기에 반찬 한두 가지면 충분하고 약간의 허기만 달래려 한다면 커피 한잔, 바나나 한 개라도 괜찮습니다. 바쁜 날엔 시리얼바 한 개와 우유 한 컵으로도 식사를 마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먹으면서 어떻게 사냐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라도 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라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물 한잔의 귀함을 알게 됩니다.


어디에 좋다는 영양제를 찾아 직구까지 해가면서 먹다가 지난달부터 유산균과 오메가 3을 제외한 비타민C, D, 마그네슘, 브로멜라민 등을 끊었습니다. 괜히 더 피곤해지는 것 같고 나이가 마흔 중반이 넘었는데 챙겨 먹을 건 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걷고 달리는 것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건강한 음식을 잘 먹는 것으로 대체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아, 가끔 힘들 땐 장모님께서 주신 홍삼진액과 꿀을 섞어 뜨거운 차로 마시기도 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에 행복해집니다.

금세 날이 추워져 음양탕을 즐겨 마시는데 이제는 한여름에도 이렇게 먹어야 속이 편하고 좋은 에너지들이 쌓이겠구나 싶습니다. 뜨거운 물 2/3, 차가운 물을 나머지 붓고 물속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을 보며 창조의 신비함을 느끼며 한 모금 마십니다. 물 한잔을 음양탕이라 부르고 좋은 기운을 얻어간다고 생각하니, 나의 풍요와 감사와 행복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며 멀리 있는 것 또한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조깅을 꾸준히 해가며 GPS 시계에 대한 고민을 했습니다. 이게 나에게 과연 필요한 물건인가, 이게 없으면 달릴 수가 없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다양한 모델을 몇 년간 돌아가며 착용하고 또 중고거래로 판매하고 하기를 반복했습니다. 물건은 필요한 만큼만 갖고 있고 많을수록 신경 써야 할 것이 늘어납니다. 더 못 가져서 안타까워했던 젊은 날의 마음들이, 두세 가지 정도의 물건으로도 소유하는 불편함으로 변해갑니다. 그래도 가지고 있는 동안 소중하게 보관하고 새로운 주인에게 그 쓰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그리고 더는 욕심에 의해 물건을 구매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옷들과 물건을 매년 단체에 기부하고 있는데 세액공제에 해당되는 금액이 90~100만 원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물건을 사용하지도 않고 보관했었다는 것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달리는 것도 굳이 필요하다면 전자시계 하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더 필요할 이유가 없습니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밖에서 달리기 어려운 날씨라면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에서 달리면 됩니다. 트레드밀에는 내가 달린 시간과 거리가 측정되고, 그것이 100% 정확하지 않고 다양한 지표들을 보여줄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내가 내 몸에 들인 애정과 노력의 시간값은 정확하게 측정됩니다.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했던 마음들이 굳이 그 하나도 필요 없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변해갑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신경 쓸 일도 줄어듭니다. 물론 이 것은 저마다의 마음에 달려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로도 족하다고 여길지, 하나라서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할지는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비교하는 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니 그만큼 남들의 이목도 신경을 덜 쓰게 됩니다.

'이만큼 나이가 되었으니, 이 정도의 사회적 지위가 있으니, 이런 동네에 살고 있으니' 하는 조건들이 나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살아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하루도 내가 걷고 싶은 만큼 걷고, 달리고 싶은 만큼을 달렸고, 아내와 따뜻한 순댓국 한 그릇에 행복했고, 커피 한잔을 들고 걷는 동네에서 오후의 햇빛을 받을 수 있었음에 충분함을 느낍니다. 근처 도서관에 들러 오전에 읽고 싶다고 검색해 둔 책 다섯 권을 빌려 집으로 오는 길은 더없이 뿌듯합니다. 앞으로 2주간 차근차근 공부하고 싶었던 분야와 관련된 책들을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더 이상 책을 구매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리고 제때 반납하며 가끔 기간을 연장하여 보기도 하는 부지런함 덕에 더 많은 책을 읽고 생각하고 쓰게 됩니다.

2024년도 개인적인 미션은 '아웃풋의 한해' 였다면, 저물어가는 올해의 목표는 '휴식과 비움의 한해'였습니다. 전에는 나를 채우기 위해 읽었다면 이제는 나를 비우기 위해 읽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스노 슌묘와 같은 작가의 잔잔한 책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책을 소장하고 싶다는 마음마저 비우게 하는 놀라움을 알려주는 책이었습니다. 읽으며 비워지는 경험은 독서의 색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부지런히 작성하던 독서노트도 간소해지고 간결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놓을 수 없는 문장들도 있습니다. 그럴 땐 늘 옆에 두고 있는 A4 크기의 그리드 노트에 내가 좋아하는 만년필로 편하게 적어둡니다. 그리고 적는 동안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기억하지 못해도 오늘 기록하는 이 행위는 결국 내 안으로 스며들어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살게 하는데에 거름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정도로도 독서는 충분하다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여전히 책장에는 89권 정도의 책이 남아있습니다.

최근 2년간 1000여 권 가까운 책들을 정리하고 남겨진 책들인데 이마저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합니다. 더 추려봐야 할 텐데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누군가가 추천하거나, 베스트셀러 이거나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책이라는 이야기로 남겨둔 것이 아닌 혼자만의 기준으로 보유하고 있는 책이다 보니 다시 한번 그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여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마음의 짐이 됩니다. 아내가, 그래서 최종 목표는 몇 권을 남기는 것이냐고 물어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 권 이내라고 자신 있게 말했는데 이제는 한 권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국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르면 좋겠다고 소망합니다. 소유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닌, 가지고 있지 않아도 내 손때가 묻었던 책들에 대한 고마움을 기억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자라 있길 바라봅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연말에는, 이 정도로 살아온 올 한 해도 '충분했다'라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다독거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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