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라는 디테일을 보는 쪼잔이의 변
“이 경첩은 대량 생산된 걸까요? 수작업으로 만들었나?”
“아니, 그게 중요해요? 작가가 전하려는 주제를 봐야지!”
지인들과 미술관을 즐겨 다니던 시절, 설치미술을 보는 관점은 두 무리로 나뉘었다. 김쌤은 주제 파악이 우선이고 박쌤은 재료, 공정, 제작 방식이 궁금하다. 김쌤과 친구들이 작품의 감동과 메시지를 논하는 동안, 박쌤 무리는 면이 몇 개인지 패널은 어떻게 배치했는지 좀 더 정교하게 구성되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같은 작품을 보고도 갖는 호기심의 범주가 다르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격언이 있지만, 그놈의 호기심 때문에 문명이 있고 예술도 있다. 사람마다 느끼는 호기심과 탐구욕도 다양하다. 삶의 이유와 존재의 의미가 알고 싶어 철학이 등장했고, 원리와 구현을 탐구하다 보니 과학과 기술이 발전했다. 예술도 기술과 더불어 발전했고 미디어 아트, 키네틱 아트처럼 이공계 냄새 풀풀 나는 예술 분야도 등장했다. 통상 예술이 인문 분야에 가깝다고 여기지만, 기획이나 해석이 아닌 구현이나 작동 방식은 이공계 업무에 가까워 보인다.
흔히 사람을 문과 성향, 이과 성향으로 분류한다. 문과인은 사람 관계에 관심이 많고 주제나 요점 파악을 잘 하며 커뮤니케이션이 빠른 반면, 이과인은 데이터와 원리, 구동방식에 주로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이런 경향이 있어 보이지만 프레임을 치우면 예외적인 경우도 많다. 감정을 중요시하며 자기 분야 외에는 놀라울 정도로 비과학인 이공계인도 있고, 법률이나 회계 종사자처럼 분석적 일을 하는 사람은 흔히 생각하는 문과 스테레오타입은 아니다. 설치미술에서 경첩이 중요한 박쌤도 문과다.
‘양반의 감상’ vs ‘중인의 감상’. 설치미술을 보는 서로 다른 관점을 굳이 분류해 봤다. 달리 표현하면 우아한 소비자의 시선과 노동자의 시선이다.
현대의 기술직, 전문직은 조선시대로 따지면 중인 계급에 가깝다. 과학기술, 의학, 세무·회계, 통번역, IT 종사자, 전문 행정직 등등. 전문 분야에 기반한 고강도 노동자들이다. 데이터를 읽고, 외국어나 숫자와 씨름하고, 분석하고 코딩하는 일은 두뇌로 벽돌 쌓는 외롭고 지난한 노동이다. 중인 계급의 일에도 창조와 상상이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구조와 데이터에 기반하여 발사되는 창의성이다.
설계하고 실무를 수행하고 뒷감당까지 책임지는 것이 생활화된 중인 계급은 구조물이나 프로젝트를 볼 때마다 작업 단계, 재료가 신경쓰인다.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칸트가 말하는 ‘숭고’를 못 느끼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테일이 신경쓰인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Details)” 독일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이다. 아무리 근사한 완성품이라도 예술혼만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벽돌 쌓는 노동의 힘이 없으면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냥 감상에 취해 풍류를 즐기고 싶은 양반 어르신이라면 영화감독이나 촘촘한 자료조사가 필요한 소설가는 되지 못할 것이다. 예술 감상에는 양반, 즉 즐길 준비가 된 우아한 소비자가 중요하지만, 예술의 창조에는 중인 계급, 즉 업자의 손길이 필요하다. 중인 계급은 감상 중에도 노동에 이입하고 만다.
난 소설에서 약과 병을 보고, 건축을 전공한 동생은 영화에서 건물을 읽는다. 법조인이라면 주인공의 행위가 벌금형인지 금고형인지 판단하고, 디자이너라면 옷을 볼 것이다. 숲이 중요하지만, 숲을 이루는 것은 나무이고 현미경으로 나무를 보면 숲의 새로운 면을 보기도 한다. 메시지와 느낌이 중요한 양반에게는 부박하게 보이는 작품이, 중인 계급에게는 디테일 때문에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업자 입장에서 흥미로운 재료나 작동방식은 별점 반 개 가산 요인이다.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 화원도 기술직 중인이었다. 예술 감상이란 달리 보면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의 산물을 을 감상하는 행위다. 약藥한 덕후는 오늘도 나무라는 이름의 노동을 보며 즐거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