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와츠 ‘블라인드사이트’ – 십자가 공포증과 항유클리드제
학명: Felis catus vampiris
일명 흡혈괭, Vamp cat
현생 집고양이의 아종으로 긴 송곳니가 특징이다. 흡혈귀가 박쥐나 고양이로 변신한다는 오랜 전설에서 보듯이 이들이 사람이나 가축의 피를 빤다는 속설이 있었으나, 실상 아무거나 잘 먹는다. 입맛이 까다롭고 도도한 일반 집고양이와 달리 뭐든지, 심지어 케첩까지 쪽쪽 핥는 모습을 보고 피를 먹는다고 오해한 듯하다.
흡혈귀가 싫어한다고 알려진 마늘에는 흡혈괭도 거부반응을 보인다. 이는 마늘에 포함된 allicin의 황(S) 성분 때문인데, 일반 고양이 및 일부 인간도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십자가를 보여주면 긴장하지만,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들고 있는 인간이 놀아주는 걸로 여기는 것이다. 흡혈괭을 십자가로 퇴치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다른 의미로 흡혈귀 같은 구석이 있다. 워낙 많이 먹고 많이 싸는 관계로 피같은 돈이 은근 잘 나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놀며 야옹거리는 관계로 기가 쪽쪽 빨린다.
물론 뇌피셜이다. 우리집 황금돼냥이는 송곳니가 유난히 눈에 띈다. 요걸 보니 야옹이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근데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송곳니의 발달을 어떻게 설명하지? 피를 좋아하는 이유는? 마늘에 대한 거부반응은 대충 퉁칠 수 있는데, 십자가 공포증은 어떡할까? 야옹이 SF를 위해 생물학적 개연성을 구축하는 일이 이렇게 어렵다.
SF라고 하면 거대한 우주적 사건이나 디스토피아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지만 생물학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존재나 상황을 창조하기도 한다. 아무 설명 없이 드래곤이나 엘프가 나온다면 판타지에 가깝다. 현재의 생물학적 패러다임으로 어느 정도 납득되는 존재, 이를 받쳐 주는 설정이 필요하다.
많은 문학에서 흡혈귀를 그려냈지만 가장 그럴 듯한 설정은 SF 소설에서 발견했다. 전 해양생물학자 피터 와츠가 쓴 ‘블라인드사이트’의 등장 인물, 아니 등장 흡혈귀다.
학명 Homo sapiens vampiris.
흡혈귀는 인간의 변종이다. X염색체의 Xq21.3 블럭에 발생한 돌연변이로 인해 인간과 다른 여러 특징을 나타낸다. 시각과 청각이 뛰어나고, 야행성 포식자(예:뱀)처럼 적외선에 가까운 가시광선도 감지한다. 대뇌피질도 인간과 달라서 사고 효율이 극단적으로 높으며 분석 능력이 뛰어나다. 한마디로 냉철하고 기민한 밤의 사냥군이다.
흡혈귀는 신경발달에 필요한 단백질 ε-Protocadherin Y를 합성할 수 없어 인간을 먹잇감으로 삼는다. 다른 포유동물이나 조류에 비해 인간이란 종은 번식률이 낮고 포유기간이 길다. 흡혈귀는 먹잇감 부족으로 인해 멸종한 것으로 추정된다.
흡혈귀의 멸종에는 십자가 결함(Crucifix Glitch)도 한몫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돌연변이는 대뇌의 시각 영역에도 영향을 미쳐, 일정 크기 이상의 가로 세로 직선 교차 형태(십자가)를 보면 발작을 일으킨다. 뇌의 수용체가 십자가의 시각 자극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흥분이 발생하는 듯하다. 자연 환경에선 정확한 직각을 보기 어려워서 흡혈귀들에게 큰 문제가 없었다. 인류 문명의 발전으로 건물들이 우후죽순 생긴 후에는 사방이 십자가라 인간 사냥하기 힘들어졌다.
이렇게 진화적 약점으로 인해 멸종된 흡혈귀도 21세기 후반 인간 과학자들에 의해 복원된다. 우주 여행, 외계 비행체의 탐사 등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에 흡혈귀의 능력은 상당히 쓸모있기 때문이다. 블라인드사이트의 배경은 2082년이다.
다행히 현대의학의 힘으로 단백질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흡혈귀도 더 이상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십자가 결함은? 약으로 치료한다. 항유클리드제(antiEuclidean)가 있다.
이 역시 가상의 약이다. 소설에서 자세히 기술되진 않지만, 이 약은 신경에 작용하여 시각을 왜곡시키는 듯하다. 십자가 결함이 발생하는 신경학적 경로가 밝혀졌으니, 해당 부위를 표적해서 작용하는 약도 개발 가능하다.
실제로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등 다양한 신경질환에서 원하는 부위를 표적 치료하는 기술들이 개발되고 있다. 약물이 뇌에 도달해 특정 부위에 작용하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 나노 기술로 해결되리라 예상된다.
항유클리드제라니 이름이 재미있다! 항십자가약이나 시각왜곡 촉진제처럼 직설적인 명칭이 아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2천년 이상 기하학의 원리로 자리잡은 학문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 중 하나는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면서 그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단 하나 존재한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직선 밖의 한 점에서 직선에 평행한 직선을 두 개 이상 그을 수 있는 공간을 대상으로 한다.
국내 버전에서는 antiEuclidean을 ‘비유클리드반응 유발 약물’이라고 번역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연상시키는 친절한 해석이다. 업계 종사자로서는 항생제, 항정신병약물처럼 심플한 단어가 익숙하지만 말이다.
뱀파이어, 십자가 결함, 항유클리드제... 흥미롭지만 이런 설정은 소설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블라인드사이트는 극강의 생물학적 낯섦으로 가득찬 작품이다. 주요 캐릭터들이 보유한 신체, 지각, 성격, 의식, 지능 모두 2021년 인간에서 보이는 평범한 속성은 아니다. 흔히 영화에서 자극적으로 다루어지는 인체 개조가 이 세계관에서는 유별나지 않아 보인다.
전직 해양생물학자의 작품답게 과학적으로 밀도 높은 하드 SF다. 참고문헌이 133개다. 먹물답다! 책 말미에 작가는 소설의 기저를 이루는 과학적 배경을 해설해 준다. 읽고 나니 끔찍할 정도로 촘촘한 생물학적 그물코로 짠 소설이구나 싶다.
낯선 설정에 이입하기 힘든 독자라면 소설이 아니라 설정집을 읽은 기분이 들 것이다. 설정의 묘미를 즐기지 않는다면 따라가기 지쳐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승질낼 수도 있다. 뭐, 내 인생이 남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듯이, 픽션이 한 줄 요약 메시지를 주려고 쓰인 것도 아니다. 발붙인 현실에 잘 직조된 가상의 옷을 입히는 그 자체를 즐긴다면 촘촘하다 못해 딱딱하게 느껴지는 이 하드 SF에서 남다른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냉랭하고 황량했던 2020년 겨울. 코로나 19의 겨울도 SF로 대뇌피질을 활성화시키니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밖에 나가기 힘드니 망상도 발전시켜 봤다. 야옹이를 흡혈귀로 만들기는 피터 와츠 씨 발뒤꿈치도 따라가기 어려우니 패스. 그렇다면 좀비캣은 어떨까.
참고문헌
Garcia-Chica J, et al. Nanomedicine (Lond). 2020 Jul;15(16):1617-1636.
Peter Watts. Blindsight. https://www.rifters.com/real/Blindsight.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