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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페로 Nov 11. 2020

덜 쿨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묘약 개발

오페라 ‘사랑의 묘약’


연배로는 선생님에 가까운 선배가 있다. 이분은 사람이 혼자 있는 꼴을 두고보지 못 한다. 싱글인 A양을 보면 자동으로 중매쟁이 알고리즘이 가동하여 B군과 매치시키는 시뮬레이션 시스템이 내장된 듯하다. 안타깝게도 수율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인다. 객관적으로 괜찮은 사람들이 서로 괜찮은 건 아는데 Feel이 안 온다고 한다. 그놈의 삘이란 대체 무엇인가?


선배는 저렇게 괜찮은 사람과 잘해 보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면서 한탄하지만, 무릇 연애라는 화재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삘이라는 이름의 불꽃이 필요하다. 불꽃을 일으키려면 호르몬의 콩깍지가 씌어야 한다. 소개팅이라는 딱딱한 프레임을 씌우면 분비되려던 호르몬도 도로 쏙 들어가기 십상이다.


일찌감치 예술에 사랑의 묘약이 등장한 걸 보면 연애 점화가 이렇게 힘든 게 요즘의 일은 아닌 듯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사랑의 묘약 덕에 연인이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서는 자는 사람의 눈에 꽃의 즙을 뿌리면 깨어나 처음 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당나귀 머리를 한 루저에게 반할 정도니 완전 강력하다). 아예 대놓고 ‘사랑의 묘약’이라는 제목의 오페라도 있다.


19세기 도니제티가 작곡한 오페라 ‘사랑의 묘약’은 아름다운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로 유명하다. 짝사랑에  가슴아파하던 한 순수한 남자가 묘약 덕분에 사랑을 쟁취하는 이야기…


오페라 '사랑의 묘약'. 네모리노 역을 맡은 성악가 중 파바로티가 단연 인기.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가 후에 줄거리를 알고 나의 무지함에 웃었다! 이 극은  오페라 부파, 코믹한 분위기에 해피엔딩으로 끝맺는 전형적인 소동극이다. 전반적인 이야기는 애틋한 아리아와 사뭇, 아니 전혀 다르다.  

 

주인공은 순박한 시골청년 네모리노다. 지주의 딸인 아디나를 짝사랑하지만 가진 것 없는 네모리노에게 그녀는 화면 속 아이돌과 다를바 없다. 이 때 엉터리 약장수, 유사과학을 파는 둘카마라가 띡 나타나 네모리노에게 거액의 돈을 받고 사랑의 묘약, 실은 싸구려 와인을 판다. 네모리노는 묘약을 마시고 취해서는 사랑을 얻었다며 자신감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네모리노의 순수함, 순진함, 순박함, 아니 어리숙함은 여러 층으로 구현된다. 그나마 없는 돈 털어서 사랑의 묘약을 덥석 사는 것도 어처구니 없지만, 실제로 있다한들 자기가 마셔 버리는 네모리노. 상대방의 마음이 아닌 자신을 변화시켜 사랑을 얻는다니, 아무리 유사과학이지만 호르몬의 기본도 모르는 급낮은 행위다.


현실에서 사랑의 묘약은 당연히 없다.  어느 정도 기분을 진정시켜 주거나 우울감을 감소시켜 주는 약은 있지만 특정 인물에게 반하게 하는 약은 전무하다. 네모리노처럼 본인이 투약해서 매력을 뿜뿜하게 하는 약도 없다(미용시술이나 스타일링 등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 최음제나 흥분제를 사랑의 묘약으로 소개하는 글이 종종 보이는데, 성욕이 연애감정의 중요한 요소긴 하지만 아디나를 향한 네모리노의 마음은 좀 더 지속적인 ‘한쌍결속’의 바람에 가깝다.


그래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삘이라는 불꽃을 일으키려면 호르몬의 힘이 필요하다. 사랑의 묘약이 있다면 중추신경계에서 호르몬 분비를 조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약물이 뇌로 이동해야 하는데, 뇌 주변에는 혈액-뇌-장벽이라는 경계막이 있어서 어지간한 약물이 이를 통과해서 뇌로 들어가기 어렵다. 혈액-뇌-장벽은 가장 소중한 뇌를 보호하기 위한 인체의 방어벽이다.

뇌 주위에 있는 장벽을 뚫고 약물을 투입하는 일, 그것이 장벽이다.


최근에는 나노기술을 이용해서 약물을 인체의 원하는 부위에 쉽게 도달하게 하는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실제로 정신과 분야에서 혈액-뇌-장벽을 통과하는 나노의약품도 연구된다. 다만 네모리노처럼 마시는 약이라면 위장관을 통과하는 동안 소화되기에 실제로 뇌로 이동하는 비율이 매우 적을 수 있다.


그런데 먹는 인슐린이 개발된다는 기사도 나왔으니 이런 방법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겠다. 인슐린은 먹거나 마시면 위장관에서 분해되기 때문에 주사로 투여한다.


개발 중인 먹는 인슐린이 대단히 새로운 성분은 아니다. 나노 기술을 이용해서 투여 방법에 혁신을 가한 것이다. 아주 작은 인슐린 주사를 캡슐에 넣어 먹으면 위장 내에서 캡슐은 분해되고 주사제들이 위장 벽에 붙어서 인슐린을 투여하는 식이다. 주사가 무섭고 번거로운 사람들에게 좋은 방법이다(물론 상용화의 길은 아직 멀다...). 사랑의 묘약도 먹는 약으로 가능할지 모른다.

 

먹는 인슐린. 주사가 번거로운 사람을 위한 멋진 선택

사랑의 묘약이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반하게 하는 마법약은 아니니 조건화가 필요하다. 적극성이 부족한 두 사람(남녀로 한정지을 시대는 지났다)이 최대한 기분 좋은 환경이나 경험을 공유한 후 긍정적인 상태에서 투여해야 효과적이다. 주사하는 장면은 연애감정에 1도 도움 안 될 테니 우아하게 와인잔이나 에스프레소잔에 담아 마시는 게  좋겠다. 성공 확률이 100%에 가깝게 증가할 듯하다.


물론 서로 비호감인 사람들이라면 효과가 없을뿐더러, 투약하는 단계까지도 안 갈 것이다. 어디까지나 합의하에 불꽃 점화를 도와 주는 약이다. 동의 없는 일방적인 투약은 당연히 범죄다.


어렵다. 이쯤 되면 타고난 중매쟁이인 선배도 귀찮아서 포기할 법하다. 유전자 보존의 의미가 점점 희박해지는 이 시대에 그리 애를 쓰고 사피엔스끼리 연결해 줄 필요가 있나 의문도 든다. 어차피 연애의 고수나 일회성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알아서 한다. 이런 복잡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알아서 하기’ 어려운 사람이거나 한쌍이라는 굴레가 필요한, 다른 의미로 ‘덜 쿨한’ 사람이다. 어차피 연애의 끝은 결혼 아니면 이별이고 결혼의 끝은 이혼 아니면 사별인데, 이 복잡한 미로에 굳이 들어가 고생을 자처하는  인간들은 호르몬과 외로움에 사로잡힌 노예일 수도 있다.


그래도 이런 노예 근성 때문에 인류가 존속하긴 했다. 한쌍결속의 요구가 덜한 지금, 그리고 이후의 세대는 사랑의 번거로움을 당연히 받아들인 안 쿨한 선조 덕분에 존재한다. 이 귀찮은 호르몬의 작용 때문에 세상이 재미있기도 하다. 사랑이 없는 세상은 편함을 지나쳐 건조하고, 무엇보다 ‘이야기’가 확 줄어들 것이다. 사랑은 귀찮아도 사랑 이야기는 즐기고 싶은 것이 얍삽한 현대인의 마음이다.


사랑이 없으면 오페라도 없고 파바로티가 부르는 '남몰래 흘리는 눈물'도 못 듣는다. ‘사랑의 묘약’에서 네모리노는 결국 아디나의 마음을 얻는다. 로맨스의 남주로는 부족한 네모리노가 사랑을 쟁취한다니 역시 오페라 스토리는 개연성이 떨어지는구나 싶지만, 아리아를 듣고 있노라면 어쩐지 납득되는 기분이다. 외모로는 그냥 아재인 파바로티가 꿀성대의 힘을 입어 꽃미남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예술이야말로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한 가장 효과적인 사랑의 묘약이다.


https://youtu.be/YOA0mxmSfsM



참고문헌 

Sharma G, et al. J Nanobiotechnology. 2015; 13: 74. 

Abramson A, et al. Science. 2019 Feb 8; 363(6427): 61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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