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냉장고에 남은 수박 반 통으로 수박 주스를 만들었다. 믹서기에 수박을 듬성듬성 잘라서 넣고 꿀을 조금 넣어 드르륵드르륵 갈았다. 처음엔 잘 갈리지 않았는데 수박이 작게 으깨지고 나서는 잘 갈렸다. 곱게 갈린 수박 주스에 얼음을 동동 띄워 마시니 부드럽고 시원했다.
그렇게 수박 주스를 마시고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풀려서 잠이 들고 말았다. 중간에 아이 소리, 남편 소리가 간간이 들렸는데 그걸 자장가 삼아 잠들어버렸다. '뭐가 그렇게 피곤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주말 동안 이리저리 다닌 곳이 많았다.
인사이드 아웃 2
둘째랑 단둘이 <인사이드아웃2> 영화를 봤다. 난 두 번째 보는 거였는데 첫 번째와 다른 감정이 들었다. 처음에 봤을 땐 '1편보다 좋다. 더 마음이 간다'라는 두리뭉실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두 번 보니 그 마음이 좀 더 세세하게 느껴졌다.
기쁨, 슬픔, 까칠, 버럭, 소심과 같은 1차원적 감정들이 편하고 익숙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자라면서 불안, 부럽, 따분, 당황과 같은 복잡다단한 감정과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왜 이런 사람일까?라는 생각이 들고 좋고 나쁨 이분법적으로 나눠졌던 세상이 다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이런 선악의 개념에서 초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동안은 좋고 나쁨, 아군과 적군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편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좋은 것도 나쁘게 될 수 있고 나를 위하던 사람도 한순간에 적이 될 수도, 나쁘다고 생각한 상황도 나에게 도움이 될 수 도 있다는 걸 살면서 깨닫게 되었다.
영화가 끝난 후 둘째에게 '어느 캐릭터가 제일 맘에 들어?'라고 했더니 '주황색'이라고 했다. 불안이는 미래에 두려운 상황을 마주하지 않도록 다양한 나쁜 상황을 예견하고 피하기 위해 애쓴다.
잠도 안 자고 열심히 무언가 하고 있지만 마음이 편해지지 않고 남은 힘마저 소진되는 상황. 처음 봤을 땐 불안이가 불편했는데 다시 보니 달래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안에도 불안이가 떨고 있는 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마음을 들여다 보고 나니 그동안의 긴장이 수박주스 한 잔으로 싹 풀렸나 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월요일 아침이지만 미뤄두었던 일을 하나하나씩 해나갈 힘과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걱정할 시간에 그냥 하자
쓸모없을 것 같은 무른 수박으로도 무언가 만들 수 있고 갈려지지 않을 것 같던 수박 조각도 여러 번의 시도로 수박 주스로 대탄생했다. 나의 오늘을 걱정으로 채울 것인지 행동으로 채울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