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공은 주인공
포켓볼의 하얀 공은 다른 공들과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그 하얀 공이 나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늘도 섞이지 않는 색을 표현하려 노력했다. 색들은 서로 만나지만 결코 섞이지 않는 그 경계를 공 속에 담아내고 있다. 세상은 다양한 색의 공들이 부딪히고 어우러지는 곳인데, 나는 그 속에서 과연 어떤 공일까 고민했다. 결국, 나는 하얀 공처럼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얀색으로만 남을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내 색을 표현하고 싶었다. 섞이지 않는, 나만의 색을.
색이 회전하는 모습, 공이 움직이는 모습을 내 그림 속에 담았다. 입체적인 구 시리즈를 계속 작업하다 보니, 문득 내가 세상을 어안렌즈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지만, 나 역시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요즘 모두가 도파민의 세계 속에 빠져가는 느낌도 들고, 그런 세상 속에서 나를 표현하는 색 또한 그 흐름과 충돌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이 공으로 나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세상이 변하듯, 나도 변해가고 있다.
비록 내 몸은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구 위에서 공전하고 있다. 태양은 대기 밖에서 우리를 보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나는 공으로 비유하고 싶다. 예술가로서, 그림과 글은 나의 삶을 기록하는 중요한 도구다. 그래서 지금도 글을 쓰고 있는데, 그 글들이 결국 모두 나의 말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모노드라마를 위해 준비했던 대본 일부를 그림 속에 담았고, 내 글 또한 공처럼 회전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림 속 사인을 찾아보면, 내 얼굴을 닮은 이니셜이 있다. 늘 웃는 얼굴을 그리고, 그 웃음은 나 자신을 닮아 있다.
예술가로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넉넉한 시간이 아니라, 오롯이 집중할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 레지던시 전시를 마무리하며 "주인공" 작업을 통해 나에게 더 집중하려 한다. 세상의 시작과 끝은 결국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포켓볼 속 16개의 공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책으로 정리해가고 있다.
그림을 그리면서 포켓볼 대신 골프공을 그릴 걸 그랬다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어안렌즈 시선으로 보기에 당구공이 더 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구 테이블 위에서 가까이 바라본 그 공들은, 내가 바라보고자 하는 시선에 가장 잘 맞는 대상이었다. 골프와 당구는 모두 구멍에 공을 넣는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 내가 원하는 시선을 담아내기엔 당구 테이블이 필요했다.
나는 여전히 포켓볼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당구의 이야기가 아닌, 어안렌즈를 통해 확장된 세상의 이야기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다음 전시회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이 시선에 대해 소통하며, 나와 작품이 여러 시선 속에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 함께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