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번은 주황 띠공
작가가 될수록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그 질문들을 받아줄 사람은 많지 않다. 결국 나는 나에게 자주 묻고 답하며, 내 생각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질문을 자주 던지는 이유는 답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나의 질문에 대한 답도 사람마다 다를 테고, 지금 내가 묻는 나만의 '산타'도 여전히 같다. 내게 가장 소중한 산타는 바로 우리 아빠다.
아빠는 딸을 누구보다 사랑해주셨지만, 자주 뵙기 힘든 분이었다. 그래서 더 그립고 보고 싶은 분이다. 외항선 선장이었던 아빠는 배에서 내리면 엄마와 산으로 여행을 다니셨는데, 그 덕분에 태어난 나는 아빠의 휴가가 반가웠으나, 함께하는 여행은 많지 않았다. 부모님의 금실은 떨어져 있어도 변함없었고, 그 사랑 덕분에 나는 옆나무의 사랑에 큰 기대를 걸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부모님처럼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많지 않다는 걸 알 나이가 되었으니까.
어릴 적 아빠는 항상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니셨다. 배를 옮겨 다니실 때마다 많은 짐이 필요했으니 그럴 만했다. 성인이 되어 아빠의 배에 올라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높았다. 눈에 보이는 높이만큼 물속 깊이도 깊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이미 엄마가 되어 있었다.
부모가 되고 나니 아빠의 사랑이 선물처럼 느껴진다. 일 년에 단 한 번 저녁을 함께할 시간도 있었지만, 내가 아빠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한 말을 늘 기억하셨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항상 선물해주셨기 때문이다. 아빠가 가져다주신 진기한 기념품들, 박제된 나비, 커다란 거북이 등껍질, 소라 껍질, 물소 뿔 같은 것들은 내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지금도 집에 가면 아빠의 서재에 남아 있는 이 기념품들은, 언젠가 전시하게 된다면 물소 뿔을 상징적으로 전시하고 싶다. 그 뿔은 당구공을 만들던 상아와 닮았고, 나에게 오래도록 영감을 준 물건이었으니까.
내게 영감을 준 건 이런 작고 소중한 아빠의 기념품들이다. 내가 아빠의 기념품들을 이렇게 오래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 내 나이쯤, 엄마와 아빠는 둘이서 사교 댄스를 추곤 하셨다. 책을 보며 "원, 투, 쓰리, 딴, 딴, 딴" 하며 연습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내가 군인이나 경찰관이 되길 바라셨던 아빠의 기대는 틀렸지만, 나는 그 기억들 덕분에 작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