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번 갈색 띠공
우리 둘째는 작고도 씩씩하게 태어났다. 그의 용기와 힘은 매일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나는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시 공간을 예약하고, 이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마음을 품던 순간 둘째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임신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말 부부로 지내던 나는 입덧이 너무 심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결국 서울로 이사해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기쁨과 함께 찾아온 걱정은 점점 커졌다. 양수가 갑자기 줄어들고, 아이는 충분히 크지 않아 대학병원을 다녀야 했다. 그러다 예정일보다 일찍 둘째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일을 겪었다.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함께 있던 네 아이들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중 한 아이가 우리 선우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 기자들의 끊임없는 전화가 쏟아지며 사건은 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2017년 12월, 서울로 막 이사 온 후 맞닥뜨린 이 사건은 나를 다시 현실로 끌어내렸다. 그때 병원을 오가며 젖을 삭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기를 지났다고 생각하지만, 의료계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대목동 사건과 소아과가 기피학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계속 떠오른다.
때때로 나는 더 나은 병원을 선택했어야 했는지, 미숙아로 태어난 것이 내 잘못은 아니었는지 자책하기도 한다. 같은 경험을 나눈 엄마들과 퇴원 후에도 모임을 가졌지만, 그 중 두 명은 여전히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었다.
나는 문화철도 959 열차 작업실에서 가장 먼저 심장과 폐, 그리고 머리를 그렸다. 상업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병원 생활을 하며 몸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 내게 그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둘째와 함께 여러 번 응급실을 오가고, 입원을 반복하며, 수술실까지 드나들었던 경험은 건강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나는 심장이 뛰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폐가 포도송이처럼 커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약물 부작용으로 쇼크를 겪고 3주 동안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었지만, 그곳에서 따뜻하고 밝게 우리 아이를 돌봐주신 소아과 선생님 덕분에 선우는 건강을 되찾았다.
코로나로 병원들이 폐쇄되고 진료를 받을 수 없던 시절에도 우리 선우는 이미 모든 위기를 지나온 후였다. 그 경험 덕분에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림보다 사람이, 그중에서도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시기에는 세상이 왜 나를 이렇게 시험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선우가 내게 주어진 기적 같은 존재임을 안다.
세상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나는 내 현실을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지만, 그 그림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그럼에도 나는 인생을 당구 게임에 비유하곤 한다. 주인공인 하얀 공이 다양한 공들과 부딪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나도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8번 공, 죽음이 오기 전에, 내 그림과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다. 삶이 요지경 속 세상일지라도, 그 속에는 매 순간 기적이 숨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