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e to face
다음 날, 진주 귀걸이 큐빅도 사라졌다. 목걸이와 세트도 아니었는데, 하나씩 차례대로 사라져 갔다. 그렇게 내 귀와 목은 어색한 짝짝이가 되었다. 허전함이 그리 크진 않았지만, 신경이 쓰였다. 그 순간 문득, 현관 앞에 걸어둔 발레 여인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림 속 여인은 아무런 장신구도 걸치지 않았다. 커트 머리와 깔끔한 발레 슈즈만이 그녀를 꾸며주고 있을 뿐, 단조로움 속에서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빛났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무엇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혹은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나는 그 그림이 내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그림을 걸고 나서부터 자꾸만 그 여자의 시선을 쫓게 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1985년에 그려졌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도 칠십이 훌쩍 넘었겠지. 하지만 그림 속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림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마치 집에 다른 존재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림을 그릴 때도 종종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그들의 붓질이 만들어낸 세계는 무엇을 담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떤 순간에, 어떤 마음으로 그 그림을 완성했을까?
오는 10월, 나는 이 발레 여인을 그린 작가를 만나기로 했다. 그날 작품의 보증서를 받기로 약속했다. 작가로 살다 보니, 진품은 작가에게 직접 보증을 받는 것이 안전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우연히 들른 갤러리의 관장님이 이 작가를 개관전에서 초대했던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술 작품과의 인연이 이렇게 우연을 가장하고 찾아오는 건 정말 절묘하다.
그림을 그리며 나도 깨닫게 된다. 나의 작품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특별한 인연처럼 다가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민이 들기도 한다. 내가 여자 작가로서 살아가면서, 나의 작품을 소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작품 그 자체에 매력을 느낀 것일까? 아니면 나라는 작가에게? 이런 의문은 가끔 나를 혼란스럽게 힌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작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오십을 넘겨야 한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누군가가 내 작품을 소장해준다는 건 그저 고마운 일이다.
최근엔 연예인들이 미술 작가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며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작품은 연예인 굿즈처럼 소비되고, 그 매력은 작품보다 그들이 가진 명성에 의존하는 듯하다. 나도 작가로서 브랜드가 되어야 할까? 사람의 매력이 때로는 말없는 그림보다 더 강렬하고 감동적인 것 같아서, 최근엔 색과 사람이 주는 매력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런 생각들이 스며들어 있는 탓일까, 어젯밤 꿈에 나는 우주 항공선을 타고 있었다. 놀이기구를 타려는 사람들처럼 긴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갑자기 줄이 끊겼다. 내 가족은 이미 타고 있었고, 나는 깃발을 들고 그 항공선을 향해 달렸다. 그 장면이 너무도 이상했지만, 나는 깃발을 든 채 웃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는 설렘에 사로잡혀, 나는 그 항공선을 타고 새로운 세상으로 향했다.
우주선을 타고 떠나는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언의 안도감을 나눴다. 마치 그들이 갈 곳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 순간 서로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FACE to FACE. 그 속에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