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E TO FACE
마주한 얼굴은 섹시한 작가님의 부조 작품이었다. 영화 촬영을 앞두고 갤러리에서 급히 작품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서둘러 작품을 디스플레이했다. 늘 바쁘게 준비하던 전시들과는 다르게, 이번 전시는 전화 한 통에 YES라는 대답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준비했던 작품 중에서도 OTP 전시회의 대표작들을 가져간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랜만에 내 작품을 직접 감상할 시간이 생겼다. 에스프레소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코로나 시기 동안 고민했던 것들, 내가 보고 싶은 얼굴들과 나누고 싶은 시간들, 그리고 커피를 내리며 느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집은 사람을 닮아있다'는 생각을 곱씹으면서, 함께 머물렀던 시간들이 자연스레 그림 속에 녹아든 것 같았다.
마시던 에스프레소 잔과 드립 커피를 내리던 시간들, 그 속에서 사랑은 과연 무엇일지 고민했다. 두 잔의 커피를 마시면 평생의 인연이 된다는 말처럼, 나는 내 사랑을 정의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동안 우리는 사유의 시간을 가졌고,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먹지 않던 커피를 마셨다. 드립 커피를 내리며 적당히 쓴 맛을 음미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여행은 멀리 갈 수 없었고, 대신 집 앞 커피숍에서 홀로 커피를 마시거나, 아파트 정원과 뒷산을 거닐며 조용한 시간들을 보냈다. 어느새 이웃과도 친해졌고, 특히 커피숍 사장님과의 대화가 짧지만 깊은 위로가 되었다. 테이블에 놓인 드립 커피는 문득 떠오른 얼굴 같았다.
종이 필터에 커피 가루가 젖어 내려가는 그 시간, 향긋한 커피 내음은 마치 사랑을 기다리는 달콤한 순간 같았다. 어쩌면 멈춰진 시간 속에서, 커피가 내려오는 속도를 계산하며 느긋하게 기다리는 그 순간이 바로 사랑이었다.
시간은 참 이상하다. 마음이 바쁘면 빠르게 흐르고, 마음이 무거울 땐 느리게 가는 법이다. 그래서 사랑도 천천히 와도 괜찮고, 기다리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전시 중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작품은 피카소를 오마주한 에스프레소 작품이었다. 대중적인 작가의 작품을 재해석해서 그런지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피카소의 여섯 번째 아내 도라 마르의 얼굴을 그렸는데, 그림 속 여인의 드립 컵에서는 커피 향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듯했다. 따뜻한 커피 주전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 순간 나는 떨어진 낙엽처럼 지난 시절이 떠올랐다.
어제 들었던 '고엽'의 가사가 애절하게 느껴졌다.
그 노래 가사처럼 갑자기 겨울 노래가 생각날 것 같은 시간이었고, 오래도록 들었던 그 노래가 오늘에서야 마음속으로 와닿았다. 그녀의 입술 색을 떠올리며 가을 낙엽의 색을 생각했다니, 그리고 여름날의 키스가 그리웠다는 그 노래 가사처럼~
장마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차창 너머로 들려오던 빗소리 속에서 나누었던 시간!
얼굴을 가장 가까이 마주하는 순간은 아마 그때였던 것 같다.
나의 그 시간은 한여름 밤은 아니었고, 한여름의 낮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