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땅 작가 Jan 23. 2022

지리교사 주역을 만나다.

41. 산택(山澤) 손(損): 덜어냄의 지혜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동궁과 월지는 경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신라 시대에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이곳은 신라 멸망 후 폐허로 있다가 1970년 중반 유적 발굴 작업을 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금은 관광객이 넘쳐나는 명소가 되었는데 특히 이곳은 야경이 유명하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기울어질 무렵 나는 식구들과 동궁과 월지의 야경을 보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아쉽게도 야경을 볼 수 없었다. 다음 달까지 공사 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관리사무소는 먼 길 온 관광객들을 배려하여 공사 중임에도 입장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아쉬움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물 빠진 연못이라도 보겠다고 동궁과 월지 정문에 들어섰다.

도대체 무슨 공사인가 봤더니 연못의 물을 빼고 가라앉은 모래와 진흙을 걷어내는 준설공사였다. 연못 바닥에는 굵직한 호스가 여기저기 놓여있었고, 바닥을 파헤친 흔적들이 보였다. 연못이나 호수 바닥에 진흙과 모래가 쌓이면 배수에 문제가 생기고, 호수 바닥에 침전물들이 많이 쌓이면 부영양화가 진행되어 물에서 악취가 발생할 수 있다. 주기적으로 준설을 해서 호수의 상태를 관리해야 하는데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던 것이다.

동궁과 월지의 야경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보다 더 귀한 월지의 바닥을 보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연못의 물을 빼고 준설하여 더 깊어진 연못은 임해전(臨海殿) 전각이 더 높게 보이게 했다. '땅을 한 자 파면 하늘이 한 자 높아진다.'는 말처럼 연못이 깊어지니 연못 주변 언덕과 건물이 높아 보였다. 아래의 것을 덜어(☱) 위엣 것이 더 높아지는 모양(☶)이 산택 손 괘(䷨)를 닮았다.   

2019년 6월 동궁과 월지(왼쪽), 2022년 1월 준설 작업 중인 동궁과 월지(오른쪽)


손(損) 괘에 대해 <주역전의>에서는 “괘 됨이 간(艮,☶)이 위에 있고 태(兌,☱)가 아래에 있으니, 산(山)의 체(體)는 높고 택(澤)의 체(體)는 깊은 바, 아래가 깊으면 위가 더욱 높아지니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뜻이 된다."라고 하였다.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한다'라고 한 말은 무슨 의미일까? 괘의 변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산택 손은 지천 태에서 왔다. 지천 태는 상괘가 음이 세 개, 하괘가 양이 세 개다. 상괘는 비어 있고, 하괘는 가득 차 있다. 가득 차 있는 것을 비워 모자란 것에 더했다. 하괘의 양효 하나(3)가 상괘의 음효 하나(6)와 자리를 바꾸었다. 하괘가 양효 하나를 비우니 연못이 되고, 상괘가 양효 하나를 받으니 산이 되었으니 산택 손이 된 것이다.

䷊ 지천 태 - ䷨ 산택 손


최부자집 6훈

경주하면 지나칠 수 없는 마을이 있다. ‘교동’, ‘교촌’, ‘교리’ 등으로 불리는 곳이다. 신라 신문왕 2년(682년)에 설립한 '국학'이 있었던 곳으로, 고려 때에는 향학, 조선 시대에는 향교가 있던 마을이라 '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마을은 '교리 김밥', '경주 향교'로도 유명하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경주 최부자집이 아닐까 싶다.

최부잣집은 17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 간 부를 이어온 집안이다. 12대 동안 대대손손 부를 쌓으면서도,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선행을 베풀었다. 흉년이 되면 활인당에서 음식을 나누어 굶주린 백성을 구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곳간을 열어 곡식을 나누었고, 일제강점기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에는 국채보상운동, 의병활동 지원, 상해 임시정부 자금지원 등 독립을 위해 집안의 재산을 바쳤다. 조선의 '노블레스 오빌리주'를 실천한 집안으로 알려져 지금까지도 세간의 존경을 받고 있다.

경주 최 씨 가문에는 '육연'과 '육훈'이 전해지는데, 그 뜻이 산택 손과 의미가 닿는다. '육훈'을 보면 허영을 버리고, 어려운 이에게 베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육연'에는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중심을 잡으로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자신이 부를 덜어(☱) 부족한 이에게 주고(☶), 자신의 욕심을 덜어내어(☱) 산처럼 마음의 중심을 흔들리지 않으니(☶) 그 상이 손 괘(䷨)와 같다.

 


연말정산

연말정산 시즌이 왔다. 내가 납부한 세금이 과했는지, 모자랐는지를 정산하는 일이다. 비슷한 소득을 가진 직장인이라도 연말정산 준비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돌려받을 수 있는 환급액의 차이가 크다. 연말정산을 잘 준비하지 않으면 내 월급(☱)의 일부가 국고(☶)로 환수된다.

다행히 이번에도 기부금의 도움으로 약간 돈을 돌려받게 되었다. 내가 기부하는 단체는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인권재단 사람),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등이 있다. 장애인 차별 철폐연대는 장애인 차별을 없애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사회에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2007년 출범한 단체이다. 교사모임에서 인연이 되어 기부하기 시작했는데 벌써 12년이 지났다.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는 평화·인권과 관련한 다양한 교육, 전시, 공연 사업을 하며 이 시대의 폭력과 싸우는 단체이다. 은사이신 한홍구 교수님의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를 응원하기 위해 기부하기 시작했다.

기부금은 약간의 돈(☱)으로 좋은 세상 만들기(☶)에 동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이 있다. 내 것을 덜어내어 모자란 곳에 보태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니다.

 손 괘의 괘사애 "손은 믿음을 두면 크게 길하고 허물이 없어서 바르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덜어내면 당장은 약간의 재물이 줄지만 결국 이익으로 돌아온다.


이전 10화 지리교사 주역을 만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