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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Sep 27. 2024

바닥이 희망일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의 <내 인생에 힘이 되어 준 한마디>에 실린 글귀들을 좋아했다.

목차에 실린 글들이 다 좋았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에 크게 다가온 글귀가 있다.

'바닥에 누워도 하늘을 본다'라는 말이다.

정호승 선생은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오죽했으면 <바닥에 대하여>라는 시를 썼을까?

그 시도 내 가슴을 때렸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정호승, <바닥에 대하여>)





바닥이 어디인지 몰라 계속 내려갔던 경험,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걸어갈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바닥에 닿기만 하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져보지만 그 희망이 점점 흐릿해질 때의 공포는 또 어땠을까?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생각한 그 바닥에 누워 있을 때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렀을까?

보이는 것이라곤 하늘의 총총한 별뿐.

그때 깨달았으리라.

하늘은 땅을 내려다보고 땅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라고.

하늘에 있는 것은 땅을 내려다보며 살고 땅에 있는 것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는 것이라고.

사람은 땅에 있으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살아야 하는데 바닥에 눕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몰랐다.

열심히 살면 하늘에 오를 줄 알았다.

능력이 좋으면 하늘에 올라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덕을 많이 쌓으면 하늘에 사는 존재가 될 줄 알았다.

하늘에 사는 존재처럼 내려다보면서 살아가기를 꿈꾸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부유한 지역 중 하나가 내가 사는 이곳, 분당이다.

나는 부유한 측에 속하지 않지만 얼떨결에 부촌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천당 밑에 분당이라고들 한다.

얼마나 좋겠냐는 말이다.

하지만 천당 밑에 있다면 천당에 가지 못한 것이다.

천당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곳이 곧 바닥이다.

제아무리 높아 봤자 바닥은 바닥이다.

좀 높은 바닥일 뿐이다.

바닥이 싫어도 그 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땅바닥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닥에 눕게 되었을 때 깨달았다.

바닥에 누워 있는 게 참 편하다는 사실을.

바닥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바닥에 누워 있으면 모든 게 희망이라는 사실을.

누운 바닥에서 일어나 앉으면 일어나 앉은 만큼 높아지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면 일어선 만큼 높아진다.

그래서 바닥은 절망의 장소가 아니라 희망의 장소이다.




미국은 1927년 이후 몇 년간 경제대공황이라는 지옥 같은 시기를 보냈다.

많은 기업이 파산하였고 가정이 무너졌다.

스스로 삶을 마감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한 끼 식량을 구하기 위해 무료 급식소에 길게 줄을 서야만 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절망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때 제임스 트러슬로 애덤스(James Truslow Adams)가 ‘아메리칸드림(American dream)’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의 책 <미국의 서사시(The Epic of America)>에서 “누구나 전력을 다해 노력하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한다면 낮은 지위에서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 있으며 가족의 삶도 나아질 수 있다.”라고 했다.

아메리칸드림은 미국이 잘 나갈 때 나온 말이 아니다.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밑바닥을 뚫고 더 깊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을 때 나온 말이다.

바닥이 희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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