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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뮨미 Sep 29. 2022

계절 5호 - 알 수 없음

< 가을 >

- 내게 사랑을 붙여줘.

 그녀가 가던 길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며 내게 나직이 말했다.

 - ..뭐?

 느닷없이 사랑을 붙여달라니. 사랑한다, 사랑해줘, 라는 말은 적잖이 들어왔지만 사랑을 붙여달라니. 어딘가 어색하고 입에 붙지 않는 말이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 난 아무것도 붙여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내게 사랑을 붙여줘.

 나는 그녀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을지 즉각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을 붙인다...’ 잠시 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그녀가 발걸음을 먼저 떼었다. 갑자기 조금 슬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선 채로 바라보았다. 늦가을의 무거운 바람이 그녀의 보라색 블라우스를 깊게 훑고 지나갔다. 오늘따라 그녀의 왜소한 체구가 유난히 더 작아 보였다. 동그랗게. 피식,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을 먹어버렸다. 갑자기 콩콩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는 걸까. 그런데 어딘가 아프다. 좋기도 한데 우울한 기분도 든다. 어쨌든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동그란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조금 슬프다고 느낀다. 그렇다. 나는 그녀가 조금 슬프다. 잠시 뒤, 우리는 파란색 대문 앞에 다다랐다.

 - 고마워. 다음에 또 데려다 줄래?

 나는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이윽고 그녀가 파란색 문 뒤로 사라지고 결국 나는 그녀와 헤어질 때까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랑을 붙여줘.. 사랑을 붙여줘..’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는 쪽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내 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녀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잠결에 나도 모르게 흐느꼈던 잠꼬대를 지나가는 누군가가 들었을까. 망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어. 나는 항상 창문을 닫고 자는데. 그렇다면 누가? 아니면 그녀에게 초능력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터질 것 같은 나의 빨간 심장이 그렇게도 쉽게 그녀의 눈에 보였을까? 아, 그건 말도 안 돼. 아니지.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이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 갑자기 가슴 한쪽이 뒤틀리는 기분이다. 괴롭다. 괴로워진다(고 나는 느낀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내게 느닷없이 사랑을 붙여달라고 했던 그녀도 나를 사랑하게 된 걸까? 사랑할까? 뒤틀린 가슴이 점점 조여 오기 시작한다. 뒤따라오는 눈물은 아픔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행복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잘 분간이 안 간다.       


  눈을 떴다. 아침인가? 몸에 살짝 한기가 돈다. 간밤에 창문을 열고 잤던 게 생각났다. 역시나.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막바지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코끝을 슥 훑고 지나갔다. 그녀와 내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마침내 파란색 대문 앞에 다다른 우리는 짤막한 몇 마디를 나누고 아쉬운 눈인사를 주고받는다. 그러면 나는 그녀가 지나간 자리 위에 우두커니 서서 텅 빈 대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겠지. 혹여나 그녀가 다시 문을 열고 나올까 봐. 보라색 블라우스를 입은 동그란 그녀가. 아, 그때가 오면 나는 말을 해야겠다. 그때 못다 한 그 어떤 말을.

 문득 슬픔 때문인지, 행복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뒤따라오는 눈물에 나는 벅차올라서 그만 웃어버렸다.







*타이틀 사진 -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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