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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다 Oct 03. 2024

남편이 미웠다

17. 분노의 노예가 되다.

극도로 예민해진 탓인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나는 집을 사무실로 쓰고 있는 개인사업자인데 택배가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도 일을 미룰 수가 없었다. 병원에 다녀온 후 몸상태를 고려해서 며칠간의 힘든 일들은 당겨서 해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작업량이 몇 배는 되었다. 덕분에 병원을 알아보는 댓글 작업을 해두고, 심신이 많이 지쳐있는 상태에서도 쉬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본업을 했다.


남편도 회사일 하랴, 같이 병원 다니랴 힘든 거 알지만 내가 이렇게 정신없이 병원을 알아보고, 일을 동안 소파에 앉아만 있었다. (남편은 다음날과 다다음날이 휴무이다. 수술하면 남편의 간호가 필요하기 때문에도 수술은 가급적 다음날로 잡아야 했다.)


"자기도 병원 좀 같이 알아보면 안 될까?"

 

뱃속에 아기를 두고 아기를 보낼 병원을 찾는다는 게 끔찍이 고통스러운 일이라 사실 이 일은 남편이 좀 알아서 해주길 바랐다.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는데 지금 알아보기 늦은 거 아냐? 그냥 자기가 아까 병원에서 알아온 그 병원으로 가자."


"인터넷으로 알아보니까 그 병원은 너무 낙후돼서 요즘은 분만하러도 안 가는 곳인가 봐. 다른 곳 찾아보고 안되면 어쩔 수 없지만 웬만하면 차선으로 두고 싶어서... 자기도 같이 알아봐 주라."


"응"


남편은 그렇게 대답하고 기껏 알아본다는 것이 초록 검색창에 검색을 해보는 정도였다. 그렇게 병원이 찾아질 리 있나... 답답했지만 기대한 나를 탓하며 남편도 크게 속앓이 중임을 잊지 않으려 했다.





"자기야, 그럼 나 이거 포장(택배)하는 것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너무 힘들어서 그래."


나는 임신 후 바깥 활동을 한 시간도 못 할 정도로 몸이 극도로 쉽게 피곤해졌다. 특히 이 날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신경 쓰고 돌아다닌 탓에 정말이지 쓰러질 것 같았다. 물론 남편도 함께 돌아다녔지만 같이 하면  금방 끝내고 내가 좀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부탁해 보았다(평소에는 서로 부탁하는 거 잘 없이 불편한 사람이 군말 없이 그 일을 하는 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내 몸상태는 안중에는 없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일 나중에 하면 안 돼? 나도 힘들어."


'미룰 수 없는 일인 거 뻔히 알면서... 어떻게 유산을 앞둔 와이프가 몸과 마음이 힘이 들든 말든 저렇게 본인만 생각할 수 있지? 내 남편 맞아?!'


'그래... 나만 힘든 것도 아닌데 열무를 뱃속에 두고 싸우지 말자... 평소에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을 거야. 지금 내가 예민한 상태라서 자꾸 화가 나는 것일 수 있어. 괜히 남편을 화풀이 대상으로 만들지 말자.'


순간 욱 하고 화가 올라왔지만, 힘든 일이 생길수록 둘이 같이 이겨내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그때마다 화를 나의 예민함으로 치부하며 덮어버리고 말았다.





며칠 전, 먼 곳에서 식당을 하시는 친정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혹시 모르니 소고기와 미역을 미리 준비해 두고 안 좋은 일로 병원에 가게 된다면 전날에 꼭 한솥 끓여놓으라고 당부하셨다. 힘겹게 일을 끝내고 드디어 좀 앉아보나 했는데, 그제야 미역국 끓이는 것을 깜빡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고 무거운 곰국솥을 씻고 미역을 불리기 시작하고 소고기를 녹이는데 이번에도 남편은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이미 준비물도 다 있는 미역국정도는 남편이 끓여주겠지라는 나의 기대감이 자초한 화였지만 얼마나 미운지 극단의 생각이 오기도 했다.


'이렇게 울면서 제 손으로 유산 후 먹을 미역국 끓이는 걸 뻔히 보면서도 뭐 하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사람과 내가 결혼을 했다니... 저런 사람이랑 같이 사는 게 맞아? 끓여주기 힘들면 사 온다고 좀 쉬라는 말이라도 할 줄 알던가... 진짜 이건 아닌 거 같아...'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남편을 그렇게도 아꼈었다. 옛말에 남편이 아내에게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주겠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남편에게 그랬다. 음식이라고는 할 줄도 모르고 설거지가 제일 싫다는 사람에게 살림은 더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고, 삼시세끼 밥과 국, 반찬과 설거지까지 모든 끼니 그렇게 정성스럽게 해다 받쳤다. 피곤해도 웃으며 함께 밥 먹는 그 시간이 참 행복했다. 그런데 그 대가가 내가 아플 때 미역국 한 그릇 못 얻어먹는 신세라니...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바란 것...

조금이라도 열무와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는데...

마음 고요히 힘들어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느라 나에게 그런 작은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서러움이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남편이 원망스럽기 시작했다. 미역국을 끓이는 중에도 화는 계속 쌓여갔고 눈물은 그칠 생각이 없었다.


남편은 그저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인데 내 마음엔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남편은 원래 흡연자이다. 시킨 적은 없지만 내가 아기를 가지고부터는 고맙게도 내 앞에서만큼은 금연자이기도 했다. 혹여나 나에게 또 열무에게 해가 될까 회사에서도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한 두 개의 담배를 피우는 날이면 샤워를 몇 배는 깨끗하게 하고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와달라는 일은 못할 망정 갑자기 쓸데없는 분리수거를 하겠다고 나서더니 진한 담배냄새를 풍기며 들어오길 몇 번 반복했다. 사실 어제도 있었던 일인데 내일부터 절대 안 피운다는 다짐을 스스로 했던 터였다.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은 백번 이해 했으나 나에게는 단순 담배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열무가 내 뱃속에 있는데 이미 열무가 없다는 듯, 아니면 있어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주의하지 않는 모습이 도저히 참아지지 않았다. 이제 열무를 보낸다고 함부로 행동하는 듯 보였고, 아무리 힘들다 해도 내일까지 담배를 참는 게 그리도 힘든 걸까... 하는 생각에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집안 가득 진동하는 담배냄새는 끝끝내 참고 있던 화가 폭발하는 발작버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우리 열무 아직 내 뱃속에 있잖아! 몇 번이나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왜 그걸 못 지켜줘?! 내일 하늘나라 간다고 오늘은 이렇게 열무한테 막 해도 돼?! 하루만 참으면 되잖아!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그깟 담배가 뭔데 나랑 열무보다 중요하냐고!!!"


우리는 연애, 결혼생활 모두 합해 의견충돌이 있을 때도 큰소리로 싸운 일은 한 번도 없었던 부부였다. 나는 처음으로 남편한테 소리를 쳤고 울부짖으며 쏘아댄 침대로 들어가서 집이 떠나가게 울었다.





열무를 보내야 하는 아픔, 부부 둘만 아는 이 아픔을 서로 나누어 가지며 위로할 줄 알았는데...

나의 슬픔과 화가 뭉쳐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극도의 분노로 변해있었다.


참고 참았다 터진 화였지만 이런 내 속을 모르고 있던 남편은 갑자기 폭발해 버린  모습에 많이 놀란 듯했다. 그렇지만 본인도 억울한 게 많다는 듯 몇 번 나를 달래 보더니 엉엉 울고 있는 나를 두고 거실로 나갔고 한동안 다시 방에 들어와 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스스로 만든 섭섭함일지 모르겠지만 남편으로 인해 내가 상처받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렇게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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