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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들때 Sep 03. 2022

우린 모두 사는 만큼 죽어가는 존재들

그러니 오늘을 살자, 사는 것을 누리며

그러니까 한 6-7년 되었을까. 강아지 단지가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심장에 추가 달려있다면 그 밤의 내 추 무게는 얼마였을까. 5kg 남짓한 그 작은 녀석이 연이어 토를 하고 비틀비틀하면서 안구 탕진(임의적으로 일어나는 눈의 떨림. 눈이 좌우로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상태의 그 공포 섞인 눈으로 '나 왜 이래요?' 도움의 눈빛을 보내던 그 밤. 내 심장 추는 한 100kg는 되잖았을까. 그렇게 아래로 툭.



콩닥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부랴부랴 달려간 24시간 동물병원에서 '날이 밝은 대로 다른 큰 병원에 보내 MRI, CT 등을 찍어봐야 될 거 같으니 일단은 집에 돌아가 기다라'는 말을 듣고, 저 멀리 처치실 문 너머 차디찬 케이지 안에 놓이는 녀석의 힘없는 꼬리에 시선을 박은 채 돌려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야했던 그 밤.  내 심장 추는 또 한 200kg는 되잖았을까. 그렇게 더 깊은 아래로 투툭..



그 뒤로 또 몇 밤이 지나고 그 밤들이 모여 21개가 되는 동안 단지는 병원 떠나했다. 그 사이 두 번의 MRI와 기타 등등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검사를 참 많이도 하였고 남편은 때마다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왔다 갔다 해야 했다. 간간이 '좀 지켜봐야 할 거 같다, 위험하다'는 말도 들었고 딱 한번 허용되었던 면회에서 투명 유리 케이지 안에서 우릴 발견하곤 비틀거리면서도 애타는 앞발로 '나 여깄노라' 반가움과 '데려가 줘' 구원 바람을 모두 드러내던 단지가 있었다. 그 녀석이 뿌예지는 게 안타까워 내 왈칵 쏟아지는 눈물조차 야속했던 그 밤. 내 심장 추는 또 한 300kg는 됐겠지, 그렇게 더 깊디깊은 심연으로 투투 툭...



단지의 병명은 내이염. 단지와 같이 귀가 아래로 덮여있는 개들(푸들, 레트리버 등)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다.  단지는 그게 너무 심해 달팽이관이 손상됐고(그래서 평형감각 사라진 단지에게서 안구 탕진과 구토 증상이 났던 거다), 뇌신경 손상까지 의심되었던 것. 다행히 여러 차례의 검사 결과 치명적인 뇌손상까지는 아닌 거 같다는(같다라니! 아니라고 말해줘요) 결과를 듣고서야, 단지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사이 녀석은 5.5kg의 건장한 '돼지 푸들'에서 4.5-4.7kg 사이를 오가는 '깡마른 푸들'이 되어 있었다.



그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랬다. 이 작고 약한 존재, 그때 단지가 많아야 3-4살이었으니 아직 한참 쌩쌩한 나이. 사람으로 치면 고등학생이거나 이제 갓 대학생일 강아지가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단 걸. 음은 그저 먼 미래, 한참 살만큼 산 존재에게나 주어지는 종착역이라 여겼던 듯싶다.



그 사이 세월이 많이 흘렀다. 단지는 이제 10살, 사람으로 치면 노년. 45살 년의 주인보다 더 어른이다. 중년이 됐다 한들 노화와 죽음, 아우르자면 '상실'에 직면했을 때 슬픔과 분노, 원망 옅게 흩뿌리며 연민과 이해, 수용 진하게 물들까지 여전히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45살의 나, 그 사이 꽤 많은 죽음들을 마주해왔다. 리고 죽음이 종착역도 아니고 시작 역, 경유역, 옆 역, 다다음 역... 그 어디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임도 점차 받아 들(일 수밖에 없게)이게 되었다. 더욱이 근래는 너무 가깝, 그 역이.



참 결혼 소식을 많이 듣던 때도 있었다. 또 한참은 아이 돌잔치 소식을 많이 듣던 때도 있었고. 그러다 점점 조부모상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이제 제법 부모상 소식을 듣게 된다. 지난주 친구의 모친상이 그랬고, 그 다다음날 선배의 부친상이 그랬으며, 엊그제는 남편 친구의 부친상, 어제는 회사 선배의 모친상이 그렇다. "요새 지인들의 부모님 상 소식이 많이 전해져 와요"라는 나의 말에, 나보다 5살 많은 동료 선생님은 얕은 한숨과 함께 대답하신다. "그럴 때죠. 그런데 샘, 이제 좀 더 있으면 친구 본인상 소식도 들려온다? 그게 그렇더라고..."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5kg짜리 작은 강아지도, 50kg짜리 사람도 모두 죽음 앞에 평등하며 너나 할 것 없이 미약하다. 그렇게 우린 모두, 살기 위해 오늘도 길을 나서지만 딱 그만큼 죽음으로 나아간다. 참으로 애잔하고 미련하다. 애틋하고 초라하다. 그렇지만 그 길도 죽을 것처럼 지나가는 것과 사는 것처럼 누려가는 것은 천지 차이. 바로 그 지점에 각자의 선택이 있다. 서로가 할 수 있는 위로가 있다.



비록 미약하나, 준비하고 함께 할 때 덜 초라하고 더 아름다울 수 있단 마음으로 난 오늘도 일터를 나가고 내담자(상담받는 분)를 만나며, 용기 내어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을 마주할 글을 쓴다. 그리고 또 찾아온 밤, 한 개의 그 밤을 소중히 품에 안고 단지와 함께 오늘의 ''을 나선다.



단지는 그 뒤 한쪽 귀의 감각을 잃고 고개가 기울었다. 그래도 단지는 잘 산다. 오늘이 세상 첫 날인 것처럼 킁킁 누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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