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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누리 Aug 28. 2023

나의 유령 어금니 모양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시 부문 선정작

나의 유령 어금니 모양





  앞집에 살던 사람이 나고 한 달 반 만에 새로운 유령이 입주했다. 위층에 거주하는 임차인은 새 세입자가 마음에 드는 듯 계단에서 마주치니, 저 집에 살게 된 유령은 계약서 쓸 때 보니 제법 멀쑥한 옷차림을 할 줄 알며, 본관이며 고향이 섬이니 싹싹하고 서명과 잔금 처리도 재빨랐는데 무엇보다 층간 소음을 유발하지 않을 것 같아서 믿음직스럽다고 했다. 아가씨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고, 굳이 인사하며 친하게 지내라는 건 아니지만, 그냥 큰일 없이 둘 다 오래 살다 갔으면 해서 그러지


  아니나 다를까 앞집은 고요하고 현관문 여닫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며


  선생님, 미닫이 달린 문틀 페인트를 새로 덧칠하려면 날이 좀 풀려야 할 텐데, 그렇죠. 흰 페인트를 흰 페인트로 얼른 덮어야 하는데


  미안, 조금 늦게 퇴근할 것 같으니 먼저 들어가 있어. 그런데 친구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주어야 함은 깜빡 잊었고 그새 두 세기가 흘렀으니 내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요하게 살아가던 앞집 유령이 매주 월요일 배달받는 새벽 배송 택배 박스가 복도에 도착했을 테니 테이프를 뜯고 박스를 열고 잠시 숨어 있으라고 말해주었어야 했는데, 내가 또 실수를


  미안하다, 나를 실컷 미워하렴.


  이제 가감속 버튼 한 번으로 세상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안녕! 이 건물에 세입자는 많지 않지만, 나와 유령, 임차인과 아랫집은 초파리에 관대합니다. 비가 내릴 때도 공동 현관문을 닫아두지 않는 것은


  우편함에 손을 집어넣으면 마른 과일 껍질 캡슐을 터뜨리지 않은 담배꽁초 다 쓴 라이터와 대출 호스트바 사다리차 마스터키 찌라시 민트 캔디 네, 원하는 것 있다면 드릴 수도 있는데요. 너무 늦었구나, 데리러 올 후손도 데리러 갈 미래도 없으므로 마른 몸을 벗어두고 소나기를 맞으러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어금니, 딱딱 소리를 내면서. 있는 것들이나 손가락을 엇갈리게 부딪치곤 하지요.


  새 여름이 왔다고 임차인은 복숭아 한 바가지를 문고리에 냉큼 찔러버리니

  감사합니다. 복숭아가 보송보송하고 동그란 것이 꼭 내 애인을 닮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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