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시 부문 선정작
환멸과 혼상
내가 거기에 없다고 해서 내가 거기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와 희는 함께 바다에 간 일이 없지만, 내가 희와 물에 대한 감상을 공유하고 있음은 허상일 리 없다.
우리는 바짝 가문 데다가 그나마도 얼어붙어 딛고 설 수도 있을 것 같은 천변을 걸었다.
침묵과도 같은 슬픔이 언 천 위에 마른 이파리로 겹겹이 동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천변을 걷기 전부터 그곳에 누워 있었으나, 꼭 선물처럼 가지런히 마련되었고
우리는 성탄전야의 어린이처럼 가만히 잠자리로 돌아가 다음 아침을 기다리는
기쁨과 불안을 손에 쥐고 길을 걸었다.
미지근한 감정이 혼곤하게 섞이는 중에도
겨울 오후 공기는 부지런히 공중을 쓸고 닦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골몰하는 걸 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걸음을 조금씩 늦출 때
희는 겨울의 속도를 따라잡듯 올봄 계획을 이야기했고, 우리는 다가올 여름에는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등산을 가자는 다짐을 나눴다.
여름이 오리라는 믿음은 애니메이션 오프닝처럼 반드시 끝이 있으리라는 불길함을
동반하였으며
나는 그 예감을 희 또한 느꼈을 거로 짐작했다.
통행금지 팻말이 붙은 너머는 아름다운 새 나라 같았다. 우리는 언젠가 그곳에 당도하리니······
천국은 아직 건축 중이라는 신의 전언을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은 사람은 여전히 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