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보라 -
찬바람이 휙 불어 친다. 하늘에서 평온히 내리던 눈들이 어쩔 줄 모르듯 사정없이 나부낀다. 바람 따라 쏠리기도 하고 끌려가지 않으려 위로 솟구치기도 하며 아래로 일제히 하강도 한다. 구슬 같은 작은 알갱이 눈들이 우왕좌왕, 대기 속을 가득 채워 몸부림치듯 흩날린다. 그런데 그 군무가 안쓰럽다가도 한순간 어쩜 그리 아름다운가! 그 눈보라의 향연이…….
소금 뿌린 듯 따갑고 아팠던 가슴을 부여안고 절망감으로 방황했던 젊은 날이 있었다. 마음 둘 길 없어 당혹스러웠던 내 마음이 꼭 저 눈보라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님을 떠나 완전히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이십 대 청춘, 사람의 편견으로부터 무시받는 씁쓸함이 있었고 나 자신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일도 순조롭게 풀리지 않는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삶의 여러 과정에서 거절당하는 쓰라림은 아팠다. 마음이 순수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타고 전달되는 차디차고 냉혹한 무정함 앞에선 그 빛을 발할 수 없었다. 눈송이처럼 몽글몽글 보풀려 있던 순수함이 산산이 부서졌다.
한동안 눈보라처럼 살았다. 하강하는 눈발처럼 나부끼며 내 존재에 대해 회의하고 서성였다. 살아갈 의미도 의욕도 사라지는 절망감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많은 쓰디쓴 눈물 덕이었을까. 까만 밤하늘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먼 별빛처럼 삶의 오기(傲氣) 같은 끈이 있어 그 기운에 이끌려 상승하는 눈발이 되었고, 일어섰으며 다시 태어났다.
생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땐 살아갈 수 있는 그 어떤 능력이 분명 주어졌을 터, 그것을 찾아 고통을 참고 인내하며 갈고닦으니 살 수 있는 인생이 되었다. 오랜 세월 걸렸다. 어둔 인생이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반전의 삶이 있다는 것은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았던 불운을 만나거나 사람으로 인하여 상처를 깊게 받는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합력하여 자신을 다듬는 선(善)으로 연결된다면 그 지난 아픔과 슬픔도 감사한 일이지 않을까. 인생의 오묘함을 체득하고 나니 산다는 것이 숙연하다.
평안이 깃든다. 자신의 지난 불운을 탓할 이유도 없고 상처 준 사람을 미워할 필요도 없다. 그 불운과 상처가 있었기에 노력할 힘이 있었고 하늘의 도움도 임하지 않았나 싶다.
인생을 단련시키는 시련은 마음의 준비가 덜된 이십 대에 한꺼번에 몰려와 에메랄드 빛 청춘을 새하얀 눈보라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한 인간으로서 독립할 때이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인생의 기반을 다지는 시기다. 그래서 청춘의 삶 과정에 시련도 정신없이 몰려와 아름답게 피어야 할 젊음이 고통으로 얼룩지며 단단히 여물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세월 지나 돌아보니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이 가장 아름다웠다. 살아있는 자로서의 생명 역동이 가장 활발했고 에너지와 꿈이 가슴 가득 충만했다. 그래서 거친 눈보라 같은 청춘이었지만 아름답게 추억되는 것 아닐까.
세월 따라 경험이 많아지면 청춘의 눈보라도 가슴에 일지 않는다. 사는 것에 대한 냉철과 체념이 적당히 자리하고 있어 누굴 만나도, 무슨 일을 해도 순진하게 그 시절처럼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 이것이 경륜의 지혜라 하지만 나는 청춘을 잃은 서글픔이라 말하고 싶다.
지나버린 청춘이 눈보라로 아름답게 반추된 건 지혜가 주는 눈부심 이런가!
겸허함이 흐른다. 살아가며 필요한 건 눈앞에 보이는 그 어떤 존재도 무시하지 않는 ‘성숙’, 남보다 부유하다고, 더 외모가 낫다고, 지식이 많다고, 타인을 경시하고 무시한다면 언젠가 난처하게도 자신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는 경우도 생기지 않을까.
눈보라 같았던 청춘을 통해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교훈을 잔잔히 가슴에 새겨본다. 좋다고 믿은 일이 나쁜 일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도 있는 삶의 이치 앞에 치우치지 않는 평정을 유지하고 싶다.
그리고 내 이웃에게 크게 도움은 못주어도 상처 주지 않는 선한 이웃으로 살고 싶다. 사람이 주는 무정과 비정의 상처는 오래도록 깊고 아리다. 말 한마디라도 따뜻함을 주고 희망을 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을 겸허하게 사는 지혜가 아닐까.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람은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커버 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