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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듕쌤 Nov 07. 2023

<6화> 슬픈 만큼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의 SCALE

남들보다 행복을 크게 느끼는 이들이 있다.


기쁨의 정도를 +10까지 점수를 매겼을 때, 누군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5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누군가는 작은 일에도 쉽게 +5 이상의 행복을 느낀다.


행복을 크게 느끼는 사람들은 모든 감정들을 예민하고 강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강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슬픔 또한 강하게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생각해도 결과는 같다.


강한 고통과 번뇌, 우울을 겪었던 사람만이 작은 행복의 순간도 크게 느끼고 그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울하던 과거엔 사람들이 나를 '넘치는 행복 에너지'라고 표현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괴로워서였을까? 아니면 부족한 나 자신을 숨기기 위함이었을까. 사람들과 있을 땐 과도한 즐거움을 표현하다가 혼자가 되면 급격하게 에너지가 떨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나의 긍정적 에너지에 반해 내가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이라고 믿기도 했었다.


외적 자존감과 내적 자존감의 괴리.
그리고 감정의 기복



겉으로 봤을 땐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감 넘쳐 보이니 이에 속은 상대는 나를 매력이 넘치는 건강한 여학생이라 생각하고 다가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열등감 덩어리의 다루기 힘든 영혼이라는 걸 들켜버리고 나면 항상 관계는 긴 싸움 끝에 지친 그들이 떠나는 비극으로 끝이 나고야 말았다.


'나의 감정기복은 어느 누구도 받아줄 수 없는 걸까?'

' 슬픔을 이해해 줄 사람은 세상에 없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지배했다. 이는 다시 자존감의 결여로 연결되었고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악순환을 끊어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널을 뛰는 기분, 몇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바뀌는 감정을 안정시켜야 했다.


우선 순환을 끊기 위해 내 자존감을 갉아먹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기 시작했다.


나를 잘 모르고 다가오는 잘난 소개팅남들, 나의 부족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야 했던 상대들.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끊어내고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 삶을 안정시켰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괴로움을 모두 제거하고 나니 그렇게 즐겁고 행복해하던 모든 운동들이 재미없고 괴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없어지니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또한 사라지고것이었다. 


등산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고, 나를 예쁘게 꾸미며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는 것 또한 재미가 없어졌다. 나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고 일상을 즐겁게 만들어 주던 모든 활동들이 의미를 잃어버렸다.


등산도, 인스타도, 운동도, 심지어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싫어져 결혼 후 혼자 집에 틀어박혀 거의 6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괴로움도, 고통도 없는 고요하면서도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괴로움이 없는 만큼 행복 또한 정말 사소했다.


길가며 만나는 햇살이 좋았고, 요리가 잘 된 맛있는 식사가 좋았다. 하지만 고요한 행복은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것 같았다. 점차 우울감이 커져서 작은 행복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고 있었다.


매일같이 만나는 똑같은 햇살에도 더 이상 행복하지 않고 맛있게 만들어진 식사에도 더 이상 감사하지 않게 되면서 고요한 평화는 그 유효기간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새롭게 생긴 이 결핍은 나에게 또 다른 자극이 되어 새로운 인생으로 들어갈 발걸음을 떼어내게 만들 것이라는 마음이었다.


고요한 시간, 외로운 시간을 어떤 의미 있는 것들로 채워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고 새로운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감정이 하루에도 몇 번씩 널을 뛴다면,

내가 우울해지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행복한 시간만 믿고 나는 그래도 밖에서는 잘 웃는다는 자기 착각에 빠져 계속해서 있고 싶지 않은 곳으로 자신을 몰아넣다 보면 우울감은 점점 더 커져 언젠간 어디에서도 웃지 못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곳에서 스스로를 건져 올려라.

그리고 고요한 호숫가가 아닌 새로운 파도 속으로 다시 몸을 밀어 넣어야만 한다.


잠시 호수에서 쉬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그 시간이 길어지면 그 호숫가마저 지겹고 행복하지 않은 공간이 되어버릴 수 있다.


큰 행복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다. 이따금씩 슬픔이 찾아와도 괜찮다.

행복을 적게 느끼는 만큼 슬픔도 적을 거고 슬픔을 느끼는 만큼 언젠가 행복을 손에 거머쥘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완전한 행복이 없다고 슬퍼하지 말자.

행복의 끝에 찾아온 괴로움과 번뇌가 인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메인사진> 역설스럽게도 가장 힘들었던 시기의 내가 사진에서만큼은 가장 행복하게 웃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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