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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듕쌤 Nov 22. 2023

<8화> 클라이밍에 중독되는 이유

위험한 운동을 좋아하는 심리

7~8년 전, 클라이밍이라는 단어가 그리 익숙하지 않던 시기에 강남의 한 실내 클라이밍장을 찾았다.


기본적으로 악력있었기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진짜 나를 그 세계에 푹 빠지게 했던 건 따로 있었다.


처음 클라이밍을 하게 되면 숟가락을 잡지 못할 정도로 전완과 손바닥에 통증이 올라온다.


하지만 그 통증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클라이밍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손바닥 통증 다음엔 등 통증, 나중에는 손끝과 온몸, 그리고 발톱이 빠질 것 같은 고통까지.


온몸의 고통을 견뎌내야만 해낼 수 있는 운동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클라이밍을 하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운동 변태'


그것이 나, 그리고 그들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우리들끼리는 종종 하는 말이 있다.


"클라이밍에 미친 사람치고 멀쩡한 사람 없잖아?"


운동으로 적당히 즐기는 정도가 아닌 그 운동에 미쳐 손발이 문드러질 정도로 운동을 하고, 다쳐도 또 하고, 아파도 멈추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정상이 아님을 알았지만 또다시 클라이밍장(이하 암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대체 왜? 스스로를 고통 속에 밀어 넣어야만 했을까?



1. 극한의 고통이 주는 쾌감.


클라이밍을 하고 나면 손가락 피부가 다 벗겨지고 어깨와 옆구리, 발톱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이겨낸 자는 정상(탑)을 손에 얻을 수 있다.


내 몸을 희생하고 아픔을 견뎌 그간 닿지 못했던 곳에 도달하는 경험은 겪어본 자만이 그 기쁨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내 삶이 만족스러운 상태라면,


굳이 내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런 기쁨을 얻을 필요가 없어진다. 즉, 클라이밍을 계속해서 하는 사람은 내 몸을 혹사시켜서라도 기쁨을 얻고 싶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극 자체가 주는 묘한 쾌감이 있다.


위에서 "운동 변태"라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이는 클라이밍뿐만 아니라 다른 종목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운동을 하면 엄청난 양의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시합 때는 자신의 몸을 다친 것도 모를 정도로 극한의 상태까지 자신을 몰아붙일 수 있게 될 만큼 호르몬의 자극은 대단하다.


대마초가 화학적이 아닌 정신적으로 중독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운동으로 인한 쾌감을 경험한 자는 그만한 자극을 계속해서 원하게 된다.



2. 인정욕구


클라이밍은 다른 운동과 달리 명확하게 '레벨'이 드러난다. 같은 문제도 풀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나뉘기 때문에 초보자부터 상급자까지 모두 그 안에서 성공이 있고 실패가 있다.


그 누구도 실패한 자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더라도, 대회가 아니라도 일상 그 자체가 경쟁이다.


나는 경쟁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쟁의 상황이 주어지면 절대 지고 싶지 않아 한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고 그것에 손뼉 쳐주는 관중들이 있고, 자랑할 인스타그램이 있는 한 스스로의 실력이 뒤쳐지는 걸 지켜볼 수가 없었다.


단 일주일이라도 운동을 쉬면 실력이 후퇴하는 극한의 운동인만큼 아파도 쉴 수가 없었던 것.


클라이밍은 혼자 등반하지만 단체운동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잘한다고 칭찬해 주고, 할 수 있다고 응원해 주는 동료들이 있는 이상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진다.



3. 그곳이 곧 내 삶이다.


클라이밍을 하는 사람들은 일상을 늘 클라이밍 크루와 함께한다.


명확히 어떤 크루라는 이름이 있지 않더라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늘 함께한다.


실내 암장을 찾거나, 야외 암장을 찾거나, 운동을 빙자한 여행을 하더라도 그 무리에 포함이 되어있지 않으면 그러한 활동들을 함께하기 힘들어진다.


최소 주 2회, 많게는 주 3회씩 하는 운동이면서 하루 3시간, 길게는 5-6시간씩 운동을 하는 동료들은 자연스레 인생의 친구가 된다.


혼이나 출산, 부상 등의 이유로 클라이밍을 중단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줄어들며 크루에서 조금씩 배제가 되기도 한다.


즉 그들과 함께 하려면 이 운동을 그만둘 수가 없다.




이 모든 이유들을 종합해 보면 내 삶의 부족한 어떤 부분을 클라이밍이 채워주기에 멈출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관계,

성공의 쾌감,

인정의 욕구,

소속감 등..


이런 것들이 다른 곳에서 채워진다면 굳이 손가락 마디가 관절염으로 변형이 되고 늘 통증에 시달리는 이러한 극한의 운동을 이어갈 필요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지 않는가?


본인이 진정한 운동 변태이거나 고통을 즐기며 행복을 찾는 사람인지 말이다.




올해 초, 다리를 다치고 임신준비를 한다는 핑계 등으로 운동을 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도 만나지 않게 됐다.


평소에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취미를 함께 즐기는 친구들이었고 그 외에 아무런 목적 없이 만나는 건 1년에 1~2번 정도인 관계들 뿐이었기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는 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떠도는 존재가 될 뿐이었다.


지금은 변태적으로 운동에 집착하던 과거와 아무것도 하지 않던 최근의 중간지점을 찾아 머무르고 있다.


가끔 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하긴 하지만 이 운동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상태.


아마도 과거 나의 외롭고 무언가 잘하는 것에 집착하던 마음이 사라지면서 클라이밍을 그저 운동의 하나로만 받아들이게 된 것 아닐까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위험하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든다면 결과적으로 진짜 쓸모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떤 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목표에 집착하여 자신을 파괴하여서도 안된다.


자신의 몸, 건강, 정신을 파괴하면서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 결과가 설령 좋다고 해도 절대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멈출 때를 알고 브레이크를 걸어야만 한다.


내 마음을 돌아보고 내가 왜 무언가에 집착을 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찾아 그 공허한 마음을 다스려준다면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충분히 그 일을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손가락이 부어오르고,

무릎이 나가고,

멈추지 않는 통증이 있는데도 그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것에 집착해야 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재활을 하며 몸과 마음을 다스려보면 어떨까?


고통이 없는 삶도 지옥이지만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도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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