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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한 날, 집 한 채 샀습니다-후편-

명품백 대신 내가 선택한 것은?

by 시크릿져니

용기내어 연락한 블로그 이웃님과 매물 임장을 같이 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내가 7년 동안 다닌 회사의 마지막 출근일이었다.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정들었던 사람들과 따뜻한 인사를 나누고 회사 로비를 나오던 순간. 아쉬움을 뒤로한 채 부동산을 보기 위해 KTX에 몸을 싣는 내 모습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벅찬 감정을 꾹꾹 누르며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마지막까지 배웅 나와 준 우리 팀 사람들의 응원이 이 날의 내 선택에 큰 힘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제는 뒤를 돌아볼 순간이 아니야.

내가 집중해야 하는 건, 지금 이 순간이야.


그렇게 조금 이른 퇴근시간에, 약속장소인 단지 내 놀이터 앞에 도착했다. 묘하게 들떠 있었다. 반년 전, 선선한 바람이 불던 가을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찾아왔던 그 아파트다. 그런데 또다시 이곳에 와 있다니.


아파트와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나는 이미 이 아파트가 운명처럼 느껴졌다. 물론 예전처럼 감정만으로 움직이진 않았다. 일주일 전부터, 과거 직접 작성해 둔 임장 기록을 꼼꼼히 다시 읽어보았고 그때 적어놨던 단지의 장단점을 되짚어보았다.


'언젠가 실거주하고 싶은 단지'


놀랍게도 내 판단은 지금도 유효했다.

그래, 나는 오늘 이 아파트를 매수할 것이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렇게 한 바퀴 둘러보고 있을 무렵, 약속 장소에 블로그 이웃님이 나타났다. 첫 만남인데도 어색함 없이 대화가 술술 풀렸다. 부동산이라는 공통된 관심사 하나로 대화는 공백 없이 가득 채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의 나는, 운이 매우 좋았다.


매물을 보여줄 부동산 사장님을 만나기 한 시간 전, 우리가 일찍 만난 이유가 있었다. 블로그 이웃님이 때마침 해당 단지에 거주 중인 지인의 집을 보여주겠다고 한 것이다. 밝게 웃으며 환영해 준 우리 또래의 신혼부부의 모습을 보며 내심 안도했다. 되려 더욱 꼼꼼하게 보고 가라고 하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후 부동산 사장님이 소개해 준 매물은 총 세 곳이었다. 그중 가격, 층, 향까지 마음에 들었던 곳은 갓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신생아가 있는 집이었다. 겨우 10초 정도였을까? 방역 마스크를 쓰고 거실 불도 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후다닥 둘러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짧은 시간 안에 결정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4년간 쌓아온 임장 경험이 빛을 발하는 걸까? 현관문을 나오면서도 머릿속에는 빠르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내일은 토요일. 오전부터 예약이 잡혀있다

현재 실거래가보다 훨씬 저렴하게 나왔다

세입자가 집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매도자가 곤란해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결정을 미룬다는 건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 이 집, 제가 계약하겠습니다.”


매도자로부터 계좌를 받을 때까지 부동산에 앉아 기다렸고 최종 네고까지 성공했다. 사정 상 먼저 자리를 뜬 블로그 이웃님께 추후 카톡으로 매수 소식을 전했고, 진심어린 축하를 받았다. 이렇게 간단하게 귀인을 만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얼떨떨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창밖으로 서울 풍경을 보며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오래 다닌 직장을 마무리했다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랫동안 그리던 퍼즐 조각이 비로소 맞춰졌다는 안도감이었을까.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고 하네.


퇴사와 동시에 집 계약이라니. 겉으로 보기엔 다소 충동적인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하루는, 수개월에 걸친 준비와 내면의 결정이 쌓여 만든 내 삶의 ‘전환점’이었다.


직장을 떠난 날, 나는 가장 내 삶에 꼭 맞는 무언가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명품백 하나보다 훨씬 더 오래, 깊게, 내 인생에 남을 것이다. 몇 년 후, 남편과 우리 아이와 함께 할 거실 풍경을 상상해본다. 햇살 들어오는 곳에 곧바로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뷰... 모든 것이 새롭고 설렐 것이다.



퇴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
그리고 그 출발점은, ‘집 한 채’였다.

이 집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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