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그래 Jun 17. 2022

착한 사람만 걸리는 병

사계_가을 [For my sister, 캐모마일]

그래야, 나 공황장애래.


지하철에서 숨이 안 쉬어지고 쓰러져서 사람들 부축받고 앉아있다가 근처 역에서 내렸어.

집 근처 내과에 갔는데 병명을 모르겠다고 정신과를 가보라고 해서 갔더니 공황장애래.


누나는 제게 이 사실을 전하려 전화했더군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처음으로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혹은 다른 가족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요.


이후 정신과를 다니며 상담할 때도 의사 선생님이 주변에 속 깊이 터놓고 말할 사람이 있냐는 물음에 동생 한 명밖에 없다고 말을 했다는데 그 말을 듣고 저는 죄책감에 휩싸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누나가 속 깊이 터놓고 하는 얘기에 대해 잘 들어주기는 커녕 똥같은 말만 싸질러댔거든요. 들어주는 것조차 귀찮아 했습니다.


누나가 다니던 회사에서 같은 부서에 있는 유일한 여자 사수가 본인(누나)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이유도 없이 혼내고 괴롭힌다는 말을 정말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그때 저는 누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요.


- 아유 그런게 어딨냐. 이유 없이 왜 혼내.

아 그럼 그냥 잘못했다고 해, 그럼 되지 뭘 그렇게 신경 써.


이딴 소리나 하고 있었습니다. 구독자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데요. 감수하고 쓰는 글입니다.


생각할수록 정말 때려죽이고 싶은 부끄러운 제 과거지만 반성하는 의미에서 가끔은 정말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는 죄를 뉘우치듯 고백하곤 합니다. 이렇게나 머저리 같은 시절이 있었다고요. 이제 훨씬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네요.


수화기 너머 그 말을 전해 듣는데 미안해서 눈물이 났어요. 전화를 끊고, 뜬금없지만 맛있는 거나 사 먹으라고 계좌번호로 백만 원을 보내줬습니다. 군대 전역하고 복학 후 기숙사비와 생활비 등을 마련하려 스키장에서 한 시즌 바짝 일해 돈을 모아뒀던 터라 돈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봤자 이것저것 쓰다 보면 금방 사라지는 정도의 금액이었지만요.


진료상담비며, 약값이 꽤 비싸다고 들었거든요. 맛있는 거 먹으라고 용돈 보내준다며 물어본 계좌번호에 10만원이 아닌 0이 하나 더 찍혀있는 걸 보고 누나는 깜짝 놀라 잘못 보낸 거 아니냐며 다시 전화를 걸었더라고요. 그냥 멋있는 척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보다 그걸로라도 스스로나마 마음속에 죄책감을 덜고 싶었어요. 어쩌면 내 책임이 아니라고 피해가려 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르고요.


누나는 상담해주는 의사 선생님에게도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동생 한 명뿐이라고 말을 꺼냈다는데, 어렵게 꺼낸 속앓이를 듣고 저는 그딴소리나 지껄여댔으니 누나가 아픈 게 내 책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죄책감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잘 말해줬으면 괜찮지 않았을까? 아니면 차라리 가만히 잘 들어주기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하고요.


누나가 다니던 회사는 이름 있는 공기업 중 한 곳이었는데요. 얼마 전에 공공기관 근무의 장단점에 관련해 우스갯소리로 돌던 말이 있더라고요.


공공기관의 장점은 잘릴 일이 없다는 점.

그러나 더 큰 단점은 ‘저 새끼(싫어하는 직장내 사람)’도 잘릴 일이 없다는 점.


제 3자인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듣고 넘길 말이겠지만 당사자로서는 얼마나 지옥 같은 말일까요.


누나는 그 지옥에서 구원해줄, 아니 말이라도 들어 줄 사람이 없어 동생이란 놈에게 털어놨는데 그 동생이란 놈은 관심이 없었던 거죠. 차라리 그냥 관심이 없는걸로 끝났으면 다행이었을 텐데요. 막 군대에서 제대한, 사회의 매운맛 따위는 하나도 모르는 피래미가 뭐라도 아는 양 훈계 아닌 훈계나 늘어놓고 있었던 겁니다. 그냥 들어주고 공감해주기만 했어도 충분했을 텐데 답답해하며 쓰레기같은 답변만 내놨습니다. 누나는 정작 답을 원한 게 아니었을텐데도요.


별 것도 아닌 군대 하나 다녀오니 세상 돌아가는 큰 이치를 깨달았다고 생각했었나봅니다. 2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군대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죄송합니다’였는데요. 그 말을 새로 배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이 했습니다. 그곳에서 죄송하다는 말은 치트키와 같았거든요. 상대에 따라 ‘죄송하면 다냐?’는 말로 더 갈구는 인간들도 있었지만, 논리가 안 통하는 그곳에서 설령 내가 억울하고 잘못이 없더라도 일을 더 키우지 않고 넘어가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던 거죠. 처음엔 정말 억울하고 적응 안 되던 이 표현도 감정을 빼며 말하기 시작하니 이보다 더 편한 표현이 없다고 느꼈거든요. 당시의 저를 변호를 해보자면 그걸 가르쳐주고 싶었나봐요.


그래서 당시에 제 머리에 든 거라곤 그딴 것밖에 없었어요. 나름은 해결책이랍시고 누나에게 뱉은, 아니 배설한 말이 그런 말들 뿐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쓰레기 같아요. 저따위가 뭐라고 해결책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단 것 자체가 웃긴 거죠. 누나가 그 상황도 더 잘 알고, 사회생활도 몇 년씩이나 해왔으니 저보다 더 잘 할텐데 말이에요.


부족했던 과거의 실수로 인한 누나의 희생을 통해 저는 그 후로 누군가가 저에게 말을 하면 해결책을 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들어주고 끄덕여주기만 합니다.


누나는 이후 건강이 좋아졌다가 다시 전보다 더 나빠지게 된 상태이긴 한데요. 시간이 지나 집에서 보니 병원에서 캐모마일과 대추차를 먹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좋다고 했는지 평소에는 잘 안 마시던 두 가지 차를 마시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걸 보고 정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캐모마일 차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차가 약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만들어 보려고요. 누군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그리고 좋은 말 한마디를 해주는 것도 약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 행동은 누군가의 걱정을 덜어주거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심지어 병을 낫게 할 수도 있잖아요.


저는 항상 ‘내가 먹고 싶은, 내가 좋아하는, 나를 위한 차’를 연구하고 개발하려 노력했는데요. 처음으로 제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캐모마일을 가지고 제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차를 준비해 봅니다. 공황장애는 착한 사람들만 걸리는 병이라고 정형돈씨가 유재환씨에게 말했다던데요. 저는 누나처럼 착하지 않아 공황장애는 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누나를 위해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이건 저희 누나를 위한 차입니다. 티 이름은 for my sister 이고요.

저희 누나처럼 착해서 마음이 조금 다치신 분이 계시다면, 여기서 차 한잔하고 쉬어가셔도 됩니다.

좋은 재료로 맛있게 만들어 드릴게요.



레시피는 추후 공개됩니다.






이전 12화 내가 또 술을 마시면 사람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