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말했듯이 앞의 표현을 빌려 3루 타자가 아닌 나와 비슷한 홈에서 시작한 무명의 타자일지라도
가끔 욕심 없이 사는 주변 그 누군가의 삶들이 가끔은 부럽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드라마도 한 편 시간 아까워 마음 놓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된 걸까?
브런치에 쓰는 글을 블로그에도 동일하게 연재하고 있다. 원래는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곳이 블로그였으나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면서 글을 조금 더 정제하여 쓰고 있는 것인데, 내 글의 한 에피소드를 읽으시곤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라는 대사의 일부를 가져와 댓글을 달아주신 이웃분이 계셨다. 장범준의 OST로도 유명해 알고는 있었던 드라마지만 워낙 드라마를 안 보는 탓에 본 적은 없었던 드라마였다.
그 댓글 하나로 큰 관심이 생겨 넷플릭스를 통해 잠깐이나마 보게 됐는데, 좋은 대사들이 참 많았다. 그중 한 대사 중에 이런 대사가 기억에 남았다.
사는 게 그런 건가?
좋았던 시간의 기억 약간을 가지고
힘들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버티는 것
조금 비관적이긴 하지만 혹독하네.
버티어간다는 말을 싫어하진 않는다. 다만 힘들게 버티는 것이 아닌 ‘동요하지 않고, 꿋꿋하게 바른 자세로.’ 뭐 이런 수식어로 버티어간다는 말을 꾸며준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줄곧 해왔다.
버틴다는 단어와 즐긴다는 단어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즐기면서 버틴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매일을 버티어 간다. 내가 이렇게 버티어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성공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건 엄마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성공에 대한 욕심이 많은 내 성격 때문도 있지만 엄마를 위해 돈을 펑펑 써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벌어보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한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시골에서 태어났음에도 부족하지 않은 집안에서 자랐다. 하지만 아빠에게 시집을 온 뒤로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이기보단 밖에서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인 남편이었고, 그 남편은 조합장 선거를 한다고 가정에 충실하지도 못했으며 선거 때문에 돈을 모으기는커녕 빚만 불려 나갔다.
그걸 감내해야 하는 것은 그녀와 나를 포함한 우리 형제들이었다. 그중 그나마 가장 수혜를 봤다고 하면 형이다. 아빠가 조합장이 딱 한 번 됐을 때 형이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아마 형을 제외하고는 누나들과 나는 학창 시절 용돈이란 개념이 따로 있지 않았다. 우리 남매 중에서 비교하려니 수혜라고는 표현했지만, 형도 그저 남들과 다르지 않은 그나마 평범한 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겠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 모두는 평생을 가난하게 지내왔다. 가정이 부유하지도 않지만 자녀는 나를 포함해 넷이나 있어 신경 쓸 곳도, 돈이 새어 나갈 곳도 너무나도 많아진 상황에서 막내인 내가 겨우 열일곱이 됐을 때, 그 못난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다.
그렇게 11년이 흘러 아빠라는 연결고리가 없어진 친가 친척들은 근근이 연락은 하지만 왕래가 거의 사라졌다시피 할 정도인 관계의 사람들이 되었고, 그러다 첫째 작은 아빠의 장남(나에게는 사촌 형)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장에 온 작은 아빠 두 분과 작은엄마들, 그리고 고모 두 분 모두 TPO*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아주 고급스럽고 예쁘게 정장과 한복 차림으로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TPO : Time Place Occasion의 준말로 시간과 장소, 상황에 맞는 옷차림을 일컫는 말)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는 친가 친척 모두가 원래 수도권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결혼식장에 오기 위해 남편도 없이 홀로 시골에서 수수하다 못해 수더분한 평상복을 입은 채로 올라왔다.
남편이라는 가족의 연결고리가 없는 그곳에서 이미 우리 엄마는 누가 봐도 친가 친척들과 같은 가족이 아닌 그림이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도 저런 예쁜 한복 입고 편하게 즐기는 자리면 좋을 텐데. 워낙 강한 사람이라 본인은 신경 안 쓰는 척할 수도 있지만 그걸 바라보는 나는 너무도 힘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엄마를 돈방석에 앉혀줘야겠단 생각을 했다. 돈을 정말 많이 벌 때까지 그 기억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결혼식이 모두 끝나자 엄마 손을 잡고 버스터미널까지 엄마를 데려다준 뒤 목적도 없이 서울 한복판을 길잃은 강아지처럼 한참을 혼자 돌아다니다가 집에 왔다. 그리고 컵라면에 캔맥주를 두 캔 마시고 잠들었다.
엄마는 몇 번이나 이런 불편한 곳을 더 가야 할까.
그리고 언제쯤이면 내가 빨리 돈을 많이 벌어서 이런 자리에 갔을 때, 엄마 기를 살려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우리 엄마는 언제쯤 친척들 앞에서 자식들 자랑을 떵떵거리며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좋은 방향으로 가져오기 위해 버티기 시작했다. 그리고 퇴사 전 이전 직장에서 일하며 돈이 모이기 시작할 즈음, 엄마 생일이 되어 고향 집에 내려가 빈 티슈 곽에 돈을 채워 넣어 이벤트를 해주었을 때 좋아했던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었을 때가 언제였나 싶을 정도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생각을 하며 더 좋은 날을 위해 오늘 하루도 잘 버티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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