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20분, 알람 소리. 눈을 뜨고 천장을 훑는다. 날이 갠 밝은 아침이다. 발밑을 바라본다. 투명한 햇빛이 하얀 벽을 타고 내려와 방안을 밝히고 있다. 깜빡하고 끄지 않은 스피커, 벽에 붙여놓은 사진, 문이 두 개 열린 붉은 철제 서랍. 부스스한 얼굴을 손으로 훑고 창문 밖을 바라본다. 멀리서 용마산이 한쪽 능선을 아차산에 기대고 있다. 가까이에는 두툼하게 살이 오른 벚나무 꽃잎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다.
반쯤 뜬 눈으로 커피를 내렸다. 어젯밤 엄마가 문자를 보냈던 게 떠올랐다. 답장했던가. 곧바로 하지 않았던 것만 또렷했고 나머지는 흐릿했다. 이불을 뒤적여 핸드폰을 확인했다. 화면의 제일 왼쪽 아래에 잘 지내고 있는지 물어보는 내용의 말이 떠 있었지만, 오른쪽은 비어있었다. 보내지 않았다. '응. 잘 지내고 있어. 걱정하지 마'라고 짧게 보내려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답장을 기다렸을 엄마. 커피 맛이 쿰쿰했다.
엄마가 미웠을까. 문자 보내는 게 귀찮았을까. 아니면 내게 너무 무거웠을까. '내 아들랴야'라고 시작하는 엄마의 문자. 이어지는 '앞으로 감사 감사하고 살자', '내 아들이 있어서 고맙다', '자식들이 있어서 열심히 살고있서' 같은 말. 서투른 맞춤법에 담긴 엄마의 마음은 무거웠다. 나에게는 그걸 바로 받아낼 탄성이 없어 가슴이 자주 막혔다. 이대로 나는 뭉개지지 않을까. 지구의 중력이 나에게만, 그것도 가슴에만 크게 작용하는 듯했다.
8년 전 아빠가 엄마와 크게 싸우고 집에서 나간 후, 현관문을 열면 암전된 거실에서 흐느낌이 들렸다. 어둠 속에 골고루 퍼진 그 소리는 내게 구체적인 진동으로 다가왔다. 뼈와 살을 타고 들어온 울음소리는 내 불안이 가진 고유 진동수와 꼭 맞았고 불안은 공명했다. 내 가슴은 공명으로 크게 떨려왔다. 거실의 불이 밝혀져 엄마의 눈물을 본다면 나는 흔들리다 못해 터져 버릴 것이기에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조용히 울던 엄마는 너무 슬퍼 더는 당해낼 수 없을 때면 술을 마시고 내 방에 찾아왔다. 그리고 내 앞에서 울었다. 잘 못 살아서 미안하다고, 아빠는 우리를 버린 나쁜 놈이라고, 네가 있어 내가 안 죽고 있다고. 분노, 미움, 후회를 담아낸 말을 몇 번이고 꺼내 놓으면 엄마의 벌건 얼굴이 조금은 말개졌다. 다음날이면 엄마는 나를 찾아와 어제 술 마시고 울어서 미안하다고 앞으로 감사하면서 살자, 행복하게 살자, 아빠를 용서하자며 다짐했다. 그리고 네 앞에서 울지 않겠노라 약속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엄마는 다시 슬펐고 술을 마셨고 나를 찾아왔고 울었다. 똑같은 이야기를 했으며 다음날 나에게 사과했다. 불안해질까 봐 불안한 게 들킬까 봐 태연한 척했던 나는 서서히 무너지다 결국 붕괴했다. 불안이 나를 잠식하는 걸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가 눈물을 흘리면 내 전체가 다 흔들린다, 그래서 눈물을 보고 싶지 않다, 제발 내 앞에서 울지 말아 달라고. 엄마는 흐느끼는 걸 멈추고 알았다고 앞으로 안 그렇겠다 했고 방에 엄마가 들어오는 일은 뜸해졌다.
내가 졸업하고 멀리 떨어지게 되자 엄마는 내게 문자를 자주 보냈다. '내 아들랴야'라고 시작하는 서투른 문자. 잘 살아가 보자, 네가 있어 행복하다, 너 때문에 산다, 아빠를 용서하자 같은 내용이 꽉 차 있었다. 어제 먹은 저녁밥 이야기처럼 헐렁하게 받아도 되는 내용이 없어 모든 걸 허투루 받을 수 없었다. 곱씹어보면 그것들은 내게 건네는 말이 아니라 엄마 자신에게 하는 다짐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잘살고 있지 못해, 행복하지 못해 애써 그래야만 한다고 엄마는 스스로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걱정됐기에 힘내자고, 나도 엄마 때문에 산다고 곧바로 답장하곤 했다.
엄마의 독백 같은 문자가 반복되면서 불 꺼진 거실에서 퍼지던 엄마의 흐느낌이 떠올랐다. 방 안에서 보여줬던 눈물과 감사, 행복, 용서의 다짐도 같이. 떨어져 있던 두 시간이 기어코 하나로 이어졌다. 흐느낌이 퍼져나갔고 불안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흔들렸다. 무너질까 무서웠다. 잘 살자, 행복해지자 다짐하면 할수록 정반대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엄마가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나에게 들이붓는 것 같았다. 엄마가 미웠다. 그날, 나는 엄마의 문자에 답변하지 못했다. 이후로 엄마에게 문자가 오면 가슴이 무거웠다. 전조증상이었다. 이제 곧 흔들릴 테니 미리 대비하라고 깊은 곳에서 보내는 경고였다. 답장을 미루면 됐다. 그러면 무거워진 것도 사라지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내겐 엄마의 눈물로 흔들리며 불안해서 생긴 상처가 있다. 시간이 지나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상처는 시뻘겋게 잘도 살아 내게 답장을 늦추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면 엄마는 어떨까. 내가 답장을 느리게 하거나 안 한다면 엄마도 상처받지 않을까. 답답해서 터질 것 같은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다면 엄마도 흔들리지 않을까. 문자를 해서도, 안 해서도 우리 둘은 상처를 주고받는다.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받기 싫다고 해서 피하기만 해도 되는 걸까. ‘나는 저 사람한테는 상처받아도 돼!’라고 한 임경선 작가의 말처럼 나는 엄마한테는 상처받아도 되지 않을까.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다. 그래도 어제 받은 엄마의 문자에 답장은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