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학문의 무용함의 유용함
한국은 지난 반 세기 동안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고도의 경제적 성장을 이룬 나라다. 특히 전쟁의 폐허와 거의 제로에 가까운 부존자원이라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기반 위에 이뤄낸 성장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경제적 기반을 다지고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한 원인은 여럿 들 수 있겠지만,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연구개발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일 것이다. 특히 공업입국을 국가 발전의 기조로 삼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한국의 부가가치는 섬유와 비료 공업부터 시작하여, 중화학공업과 제철산업, 건설토목과 조선업, 전자공업과 디스플레이 그리고 반도체, 그리고 최근에는 IT 산업과 문화 콘텐츠 산업으로의 산업 전환을 거쳐 꾸준히 생산되고 있는데, 그 기저에는 공통적으로 기업과 정부의 집중적인 R&D 투자가 있어 왔다. 이러한 R&D 투자는 주로 R보다는 D, 즉, 개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산업개발 초기에는 정부 주도의 공업 기반 다지기에, 산업개발 중기에는 대기업 주도의 선진 산업 따라잡기에, 그리고 최근에는 기업과 정부, 그리고 연구소와 대학이 골고루 선행기술 개발에 더욱 집중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개발은 각각의 시기에 맞춰 산업의 경쟁력은 물론 기술에 있어서도 표준 경쟁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반세기 넘게 집중되어 온 연구개발 기조가 주로 경제 성장과 궤를 같이하다 보니, 어느새, 한국에서는 연구개발의 방점은 개발에 주로 찍히게 되었고, 어떤 연구든 그 최종 결과가 부가가치 창출, 즉, 쉽게 말해 돈이 되는 연구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시되는 문화자 자리 잡히게 되었다.
사실 기업에서 투자하는 연구개발비용은 매몰비용이 되면 안 되므로, 그 결말이 반드시 신기술 개발, 신상품 개발, 새로운 서비스 개발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논리다. 연구개발을 통해 특허 같은 IP를 창출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경쟁력을 기르고 시장점유율을 높이며 수익을 최대로 가져갈 수 있는 고리가 확실하게 자리 잡힌 산업에서는 오히려 연구개발이 없는 기업이 결국 쇠망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렇지만 연구개발의 주체가 수익이 아닌 다른 목적을 두고 자금을 투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빌 & 멜린다 게이츠가 설립한 게이츠 재단은 수십억 달러의 재원을 바탕으로 전 세계 과학자들, 특히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수익 여부를 묻지 않고 인류의 당면 과제, 혹은 오랜 난제를 연구할 수 있는 자금을 투입한다. 퀀트 투자로 거대한 수익을 거둔 짐 사이먼 같은 물리학자 출신의 투자자 역시 지금 봐서는 전혀 돈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분야의 기초과학, 특히 이론물리학 분야를 중심으로 수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며 연구의 맥이 이어지게 하고 있다. 하워드 휴즈 재단 역시 생명과학 분야에서 인류의 난치병 치료법이나 새로운 약제 개발을 위한 기초과학에 수천만 달러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 재단이 이러한 기초과학을 지원하기에는 그 규모와 분야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는 기초학문, 특히 기초과학은 정부가 지원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한국의 경우, 정부가 지원하는 기초과학의 재원은 여전히 지나치게 적은 규모이며, 분야 역시 제한적이라 많은 기초학문이 고사 직전에 놓인 위기 상황이다. 거기에 기왕 지원된 기초과학에 대해서도 정부의 요구 사항은 결국 그 연구 결과가 어떻게 부가가치 창출, 산업적 영향력 창출과 연계될 것인지에 대한 방안 모색이 되는데, 이는 기초과학의 우연성, 기초과학의 불예측성, 기초과학의 실패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방향이다.
기초학문은 가치 찾기 게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가치를 찾자면 '무용성'이 진짜 가치일 것이다. 정량적 가치 측정이 되고, 취업률을 제고할 수 있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인사를 배출할 수 있으며, 엄청난 기부금을 기대할 수 있는 동문을 배출할 수 있는 류의 학문은 기초학문이 아닐 것이다. 그런 학문만 수용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기초학문을 굳이 수용할 필요도 수용할 수도 없다. 낡은 건물의, 담쟁이덩굴이 가득 덮인 오래된 열주들처럼, 기초학문을 커뮤니티의 주변부에 장식품처럼 배치할 필요는 없다. 애써 어울리지도 않는 기초학문을 굳이 사회 속에 배치해 두고, 우리 사회도 기초학문을 중시한다는 코스프레를 하려 한다면, 어디에선가는 학문을 바라보는 가치 판단에 대한 시각 차이로 인해 응력 (stress)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얼마 되지 않아 그 지점에서는 균열이 발생한다. 균열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지점을 시작으로 하여, 둘 사이에는 긴장이 생기고, 열역학적으로 불안정한 혼합물이 늘 그렇게 되듯, 상분리 (phase separatIon)이 생길 수밖에 없다.
기초학문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기초학문을 수용하면 된다. 예술품에 대한 시각이 가치 초과적이고, 가치중립적이고, 포용적인 사회라면, 예술 활동이 장려되고,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예술품에 대한 시각이 환금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작품에 대한 사상이 검증되는 사회라면, 예술 활동은 위축될 것이고, 사회의 입맛에 맞는 한 줌 밖에 안 되는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을 것이다. 가치 측정이 정확히 되고, 실질적 환금 가치가 기대될 수 있는 학문만 수용이 되는 사회에서는 기초학문이 공존할 수도 없고, 공존할 필요도 없다. 기초학문은 애초 동시대의 부가가치를 보장할 수 있는 성격의 학문이 아니다. 동시대에 부가가치를 가끔씩 확신시켜 주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은 동시대의 평가 관점에서는 낙제점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 어찌 보면 정상적이다. 따라서 기초학문의 '무용성'을 그 학문의 고유 가치로 인정할 수 있는 나라라면, 그것을 품을 수 있을 것이고, 인정할 수 없는 나라라면, 그것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된다. 애써 코스프레할 필요 없다.
복소수 (complex number) 개념은 고등학교 과정에서 배우는 개념 중 가장 충격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도대체 제곱을 했는데 어떻게 음수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인가? 뭐 실제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상상이라고 하자고? 그래서 허수를 도입하고, 거기에 실수를 짝 지워서 그것을 통틀어서 복잡한 숫자, 즉 복소수라고 하자고?" 많은 학생들이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지금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왜 필요한 숫자인지 납득이 안 될 수 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렇지만, 복소수는 파동 (wave)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물리적 대상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다. 특히, 양자역학에서는 보른 (born) 해석에서도 보인 것이듯, 파동의 진폭 (amplitude)의 절댓값의 제곱이 파동의 존재 확률을 지배하는데, 복소수의 도입 없이는 이 개념이 모순 없이 성립하기 어렵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진동은 진폭이 시간에 따라 주기적으로 변해야 하는 것인데, 확률은 변하면 안 되니, amplitude의 절댓값 자체는 보존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amplitude의 절댓값은 건드리지 않은 채, 진동의 물리적 특성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은 파동 함수를 복소수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면 amplitude의 절댓값은 놔둔 채, 위상 (phase)에 진동의 뉘앙스를 부여할 수 있다. 즉, 에너지 고유 벡터 (eigenstates)는 invariant로 만든 채, 위상의 변화에 시공간의 진동 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의 추상적 수학 이론이, 20세기에 접어들어 물리적 의미가 부여되는 대상이 되고, 21세기가 되자, 사람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공학적 시스템으로 체화되는 사례를 수백-수천 가지 들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수백-수천 가지 사례의 밑바탕에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기초학문의 가치는 현시대에서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평가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후세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당장 내일의 밥벌이가 중요하고, 내년의 환금성이 중요하고, 10년 후의 먹거리가 중요한 사회는, 그것에 집중하면 된다. 다만, 후세가 평가하는 가치는 '그들은 당장의 삶에 집중하며 열심히 살았다' 정도 밖에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뭐 어떤가. 내일의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매일 출근하고 열심히 쳇바퀴 굴리는 삶도 의미는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된다. 사원수 (quaternion), 심지어 팔원수 (octonion) 같은, 일종의 확장된 복소수 개념을 다루는 수론 (numerology), 그리고 그것의 응용을 찾는 양자장론 (quantum field theory)가 도대체 현시대에 어떤 가치를 갖는지, 극히 일부의 학자들만 인사이트가 조금 있을 뿐, 대부분의 학자들, 그리고 일반인들은 그것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하기 어렵다. 비교할 대상도 부족하고, 직관적 느낌을 전달해 줄 물리적 대상도 매우 매우 드물다. 그렇지만, 이들의 추상적 개념과 겨우겨우 물리적으로 연결될 것처럼 보이는 이론물리학에 대한 연구가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게 되면, 22세기 혹은 그 이후에, 20세기의 복소수가 보여 줬던 개념의 결실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현시대만 살고 말 것이 아니라, 시간의 차원을 우리의 삶의 차원으로 가져 오려한다면, 무용성을 갖는 기초학문을 현세로 내삽시키는 것이 아닌, 후세로의 외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 사회가 기초학문, 더 좁게는 기초과학을 수용할 수 있고,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대상을 다루고 싶어 하는 외톨이 학자들이 척추를 펴서 자세를 잡으며 공존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서울대 김영민 교수의 아래 칼럼에 나오는 일화를 재인용하고 글을 매조지하자.
[어떤 신문기자가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에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이 낭가파르밧 설산을 오르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메스너는 대답했다. “그렇게 묻는 당신의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의 대답에는 보통 사람이 쉽게 가지기 어려운 어떤 정신의 척추 기립근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 정신의 척추 기립근이야말로 유용성의 신화가 지배하는 21세기에 무용한 공부에 매진하는 이에게 허용 된 마지막 기대효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