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먹는 저녁

by 지나온 시간들


어렸을 때 아버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당시 우리 집은 식구가 많았다. 할머니도 가끔씩 오셔서 오래 머물다 가시곤 하셨다. 형, 누나와 사진관을 운영하시던 아버지에게 기술을 배우러 온 기사형 2명도 같은 집에서 살았다. 방이 3개였는데 할머니와 누나가 한방을 쓰고, 아버지 어머니 형과 내가 한방을 쓰고, 기사형 2명이 방 하나를 썼다. 어머니는 할머니와 기사형들 식사 때문에 매끼를 연탄불로 해내시느라 온종일 허리 펼 시간도 없으셨다. 내가 어머니 도와드린다고 연탄을 나르다가 깨 먹은 것도 수십 장은 될 것이다.


아버지는 15세에 집을 나오셨다. 고향인 영동에서 농사짓는 게 너무 힘들어 평생 농사 지을 생각을 포기하고 외지로 나가 사진 찍는 기술을 배우셨다. 처음에 마산에 가서 기술을 몇 년 배우고 청주로 와서 일을 하다 어머니를 만나 자리를 잡으셨다. 힘들게 먹고 살아가야 할 60년대 70년대였기에 정신없이 일만 하셨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독립해 혼자 살아가기는 너무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침만 드시면 바로 나가셔도 한밤중에나 들어오셨다. 따라서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잠들어 본 적이 별로 기억에 없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같이 놀아 본 기억도 별로 없다. 축구나 운동을 같이해 본 적도 전혀 없었고 집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같이 가본 적도 한 번도 없었다. 가끔씩 일요일 아침에 집 뒤에 있는 용화사라는 절이나 우암산을 올라가 본 것이 전부다. 어렸을 적 가족 여행도 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초등학교 다니던 70년대에 서울 구경을 한 번 정도 가본 기억은 있다. 당시 가장 높았던 삼일빌딩과 남산, 그리고 창경원에 있는 동물원 구경을 가본 기억은 난다. 친척 결혼식이라서 부산에 한 번 가봤던 것 같고, 명절에 가끔씩 할머니가 계시는 영동에 가 본 것이 전부인 듯하다. 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가 내가 어렸을 때 다닌 우리 가족 여행의 전부다.


아버지는 바쁘시기도 하셨지만 내가 공부하는 것이나 다른 일에 관심이 전혀 없으셨다. 중학교 다닐 때 한 번은 학교 서무실에서 나를 오라고 했다. 가보니 서무과 선생님이 등록금을 냈는데 왜 이름만 써서 냈냐고 혼내시는 것이었다. 이름만 쓰고 돈만 내서 일 처리하는데 왜 복잡하게 하냐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등록금 영수증을 보니 정말 내 이름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받은 등록금 용지를 어머니에게 드렸는데 아버지가 은행에 등록금을 내러 가셨다가 내가 몇 학년인지 몇 반인 지를 몰라 그냥 내 이름만 쓰시고 돈만 내신 것이었다. 그 이후로는 어머니께 등록금 용지를 드릴 때 항상 학년 반 번호 이름까지 써서 드렸다.


내가 고등학교 가서 문과를 가야 할지 이과를 가야 할지 너무 고민이 많았는데 그 누구도 조언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학교 다니면서 아버지가 사다 주시는 문제집 한번 풀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고등학교 처음 입학했을 때 나는 교과서만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 줄 알았다.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듣고 교과서만 공부했다. 그런데 주위에 있는 아이들은 교과서 말고도 이상한 책으로 공부들을 하고 있었다. 저 책이 뭔가 했다. 아무 생각 없이 1학년 중간고사를 치렀는데 교과서에도 없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이 나왔다. 수학이라면 자신이 있었던 나로서는 고등학교 1학년 첫 번째 중간고사에 받은 수학 점수에 충격을 받았다. 중학교 때는 한 문제도 틀리지 않을 정도였는데 점수가 왜 그런지 이해가 안 갔다.


뭔가 문제가 있구나 싶어 당시 반장에게 살짝 물어보았는데 교과서만 공부하면 안 되고 수학의 정석이나 해법 수학 같은 게 있는데 그것까지 다 해야 한다고 얘기해 주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수학의 정석과 해법 수학을 사서 공부를 했다. 당시 속상했던 것은 주위에 누군가가 그런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그 이후로 더 나이가 들어 내가 아빠가 되면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골라서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그런 것을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해서였다. 부모님이 사다 주시는 책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었던 게 내 어렸을 때 꿈이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어느 책이 더 좋을까, 어느 교재로 공부를 하면 시간을 아껴서 좋은 효과를 얻어 좋은 성적을 받을까 항상 고민을 하며 서점에 가서 모든 책을 다 보고 아이들에게 사다 주곤 했다. 하지만 나의 꿈은 단지 나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알았다. 저번에 우리 아이들이 그랬다. 아빠는 왜 자꾸 이 책 저책 사 오냐고. 책이 많아서 질려 죽겠다고. 나는 그 책을 다 공부하라는 뜻은 아니고 그중에 맞는 것을 골라 공부하면 좋을 것 같았는데 그건 단순히 내 꿈이었을 뿐이었다.


대학을 진학하고 군대를 가고 유학을 가고 결혼을 하는 데까지도 아버지는 나에게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냥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했다. 처음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때도 어떤 정보도 없이 혼자서 전부 다 해내야 했다. 부모님은 내가 미국 가던 날 공항에 나오셔서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게 다였다.


나는 솔직히 아버지가 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랐다. 한때는 정말 아버지에게 회초리도 맞아보고 싶었다. 솔직히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아버지한테 맞아보는 게 소원이었다. 어머니한테는 회초리를 많이 맞았다.


어렸을 때 형하고 싸웠는데 형이 나보다 3살이나 많으니 덩치가 훨씬 컸고 힘도 훨씬 셌다. 나는 내 나이 또래에 비해 항상 덩치도 작고 힘도 약했다. 초등학교 신체검사를 해마다 했는데 3학년이 되어서야 나는 간신히 20kg을 넘겼다. 하루는 형하고 싸우다 형이 나를 밀어젖혔는데 너무 세게 미는 바람에 거실에 있는 유리창 있는 문으로 내가 넘어졌는데 유리창이 와 창창 깨지면서 내 온몸에 유리가 박혔다. 그 소리에 어머니가 깜짝 놀라 부엌에서 달려 나오셨는데 피가 철철 나는 내 몸을 보시고 형을 빗자루 몽둥이로 두드려 패시는데 형이 맞다 맞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동네 밖으로 도망간 적이 있었다. 온몸에 유리가 박힌 나도 어머니한테 맞았다. 그 이후로 나는 형과 크게 몸으로 싸우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의 그런 회초리가 그리웠다. 어렸을 적 나는 아버지의 관심과 기대가 너무나 그리웠다.


아버지는 내가 잘못을 하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셨다. 사고를 치는지 나쁜 짓을 하는지 돈을 어떻게 쓰는지 빚이 있는지 여자관계는 어떤지 전혀 모르셨다. 나는 솔직히 그런 것들이 너무 서운했다. 나에게 왜 이렇게 관심이 없으신 걸까? 저녁을 같이 먹을 때나 어디를 갈 때도 말씀도 거의 없으신 채로 그냥 밥만 먹고 그냥 차만 타고 가곤 했다.


세월이 정말 많이 흘렀다. 우리 아이들도 다 컸다. 이제 셋째만 고등학생이다. 우리 아이들은 이제 내 손을 떠났다. 아이들을 위해 정신없이 살다 보니 부모님은 너무 연세가 많이 드셨다.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흐른 것일까? 저번에 병원에서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봤다. 아버지의 살가죽, 하나도 없는 다리 근육,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요즘 아버지와 밥을 같이 먹다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예전엔 드시는 것도 많이 드시고 이것저것 잘 드셨지만, 이제는 드시는 양이 현격히 줄었다. 이제 아버지와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식탁에 앉아 아버지와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할 따름이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는 이제 식탁에 앉지 못하실 거다. 같이 수저를 들고 밥을 먹을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드시고 싶은 것을 여쭈어보고 사다 드리고 싶어도 아버지의 건강상 이제는 그런 것도 하지를 못한다.


시간이 야속하다. 하느라고 했지만 시간이 원망스럽다. 어떻게 살아오셨건 나에게 아버지는 지구 상에 오로지 한 명뿐이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비롯됐다. 내가 지켜드려야 한다. 이 지구 상에 계시는 그 순간 마지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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