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지금 따뜻합니다
나는 영업직으로 일해본 적이 없다.
10년간 관리부서로 일을 해왔기 때문에 늘 마감일정에 쫓기기는 했어도, 실적에 대한 압박에선 자유로웠다.
그래서 내가 실적압박이 없었다면 누군가 다른 쪽에선 그 압박을 오롯이 받고 있을거란 생각을 미처 못했다...!
입사한 지 얼마 안됐을 때는 제때 결재나 서류 등을 보완하지 못하는 영업직군들을 탓했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가며 소위 말해 그들을 갈궜다.
"대리님, 서류 빨리 보완부탁드립니다. 마감 지연되고 있습니다!"
"과장님, 결재 오늘까지 올리셔야 저희 회계마감 합니다. 바로 진행해주세요!"
사원때부터 대리고 과장이고 없이 일의 시작과 끝이 재촉인 느낌이었다. 재촉하기 전에 미리 좀 제대로 할 수 없나? 라고 그들의 업무태도를 폄하하기도 했던 것 같다. (물론 나도 다른 유관부서에서 다른 방식의 재촉을 받는 입장이긴 했다. 같은 회사에서 갑만 할 수 있겠나, 어디)
종종 회사와 거래를 하는 은행담당자한테 이런 전화를 받기도 했다.
"저... 대리님, 혹시 죄송하지만... 저희가 이번에 프로모션 진행 중인 카드가 있는데 하나 발급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가입비는 제가 다 부담할거고 만드셨다가 대리님은 3개월 후 해제하셔도 됩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보통은 해달라는대로 해주긴 했으나 썩 유쾌하진 않았다. 아주 조심스럽고 낮은 자세로 걸려오는 그 무거운 전화를 나는 '그래, 너의 그 부탁을 내가 들어주도록 하지.' 하는 굉장한 고자세로 해주곤 했다. 그렇게 몇 개의 이용하지 않는 카드와 무늬만 적금이 쌓였었다.
최근엔 새로운 업무를 하게 되며 거래처 영업담당자 직원들과 미팅이 잦았다. '미팅'이라는 단어는 거창했지만 대개는 '저희한테 오더를 주세요, 저희 제품 좀 써주세요, 싸게 잘 해드릴게요.' 를 듣다 오는 자리였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사는 점심을 먹고, 그들이 사는 커피를 마셨다. 팀장님과 가도, 부장님과 가도, 그들의 사는 밥과 커피를 먹고 마시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어느새 카드 한 장조차 없이 수첩하나 챙겨 담당자를 만나러 가는 나를 발견했다.
나한테 마감재촉을 당하는 우리 회사 영업부 직원도, 나에게 카드와 적금을 부탁하는 은행담당자도, 시간을 쪼개 미팅하러 오는 거래처 영업담당자도 사실 모두 그냥 나와 같은 직장인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깨달음을 얻은 게 얼마되지 않았다.
내가 납기를 맞추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고, 숫자 하나, 차트 하나 틀린 것 없이 보고를 올리고 장부를 맞출 때, 영업직은 실적 하나를 더 얻기 위해 여기 저기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본인의 일을 해온 것이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짠하게 자기 몫의 일을 하며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못할 상황도, 받아들이지 못할 일도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나를 힘들게 하려고 일부러 서류를 늦게 보완한 게 아니고, 나에게 뭘 뜯어가려고 카드발급을 종용한게 아니고, 그저 심심해서 노가리나 까려고 미팅자리를 만든 것이 아니니까.
오늘은 또 어떤 말을 해가며 이 사람과의 만남을 가질까, 만나서 쓰는 비용은 또 얼마나 나오려나, 마음 다잡고 수화기를 들어 내 번호를 꾹꾹 눌렀을 그들의 마음이 왠지 애잔하게 느껴진다.
요샌 왜 이리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가득해지는지 모르겠다.
아침저녁으로 사뭇 추워진 날씨 탓인지, 호르몬이 널뛰는 나의 임신 탓인지,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바라보려는 뱃속 아가의 따뜻한 심성 탓인지.
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영업의 마음을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 그 뿐이지만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서로에겐 큰 위로가 될 것 같다. 우리들의 인생이 서로에 대한 연민과 친절함, 그거면 꽤 따뜻해지지 않겠나.
영업이든 관리든 디자인이든 마케팅이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우리 직장인들의 삶 속에 서로를 따뜻하고 친절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어쩌면 허무맹랑한(?) 꿈을 꾸며 오늘의 글을 마무리 짓는다.